30. 짧은 순간들이 소중한 것처럼

- 카스카이스 호카곶 여행 -

by 임선영
@Lisboa, Portugal


여행하며 발견한 나는 날씨 변덕에 따른 기분 변화를 심하게 느끼는 사람인 게 분명하다. 해 맑은 날씨가 나타나자마자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고, 바다를 간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했다. 다들 신트라 Sintra를 시작으로 호카곶 Cabo da Roca, 카스카이스 Cascais를 여행하지만 나는 신트라를 가볍게 포기하고 반대로 카스카이스를 들려 로카곶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집 앞에 바로 있는 카이스 두 소드르 Cais do Sodre 역에서 카스카이스는 편도 2.15유로. 왕복으로 사는 게 더 저렴할까 싶었는데 편도나 왕복이나 가격은 동일하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고 알아서 교통카드를 충전시켜주었다.


슈퍼에서 산 바나나 2송이와 물을 챙겨들고 가벼운 기차에 올랐다. 빈자리에 모르는 사람들과 마주 보며 앉자 기차가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를 뒤집어타고 세상을 뒤로 보는 재미. 앞을 보며 앉아있는 사람들보다는 멋진 풍경을 먼저 볼 수 없지만 더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다. 그렇게 중간중간 지나치는 바다가 너무 예뻐서 내리고 싶은 마음을 마지막 정류장까지 겨우 참았다.


카스카이스 역에서 내려 바다에 바로 갈까 하다가 슬쩍 다른 길로 빠져서 골목을 더 구경하기로 했다. 동네는 한 바퀴 산책하면 다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아담하지만 휴양지로 유명해서인지 있을 건 다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교차로 광장에서 플리마켓이 열렸다. 플리마켓의 분위기를 한껏 띄워주는 낡고 작은 회전목마. 이제는 커버려서 아무도 타지 않겠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동네에 하나쯤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우르르 펼쳐진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오래된 종이 한 장과 livre가 적혀진 종이, 깃털 펜, 잉크가 하나로 합쳐진 배지 하나를 샀다. 괜한 사치를 부리지 않으려고 돈을 아껴 쓰고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물건 앞에서 지갑이 열려버렸다. 여행 일기장 사이에 종이를 꽂아두고 자수를 놓던 겉표지 옆에 배지를 달았다. 이럴 때에는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물건에 가치를 두는 스스로가 뿌듯하기도.


느릿하게 걸어서 15분 정도면 도착하는 바다. 시월에 여름 같은 날씨인 것도 심지어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도 낯설지만 오늘 포르투갈 날씨는 여름이다. 레깅스만 안 신었어도 바로 바다에 뛰어드는 건데. 슬프게도 레깅스를 벗을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서 바다에 뛰어들기는 포기했다. 그냥 양말만 신고 올 걸 땅을 치고 후회하며 특별히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야외에서 마시는 기포 가득한 맥주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입가심을 위한 에스프레소. 오히려 이제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애매한 느낌이다.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카스카이스에서 호카곶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30분 간격으로 있는 403번 신트라 행 버스에 불이 들어왔다. 카스카이스에서 호카곶으로 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버스는 조용했다.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아 어마어마한 바다와 정말 사랑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 가는 내내 창밖을 보며 감동하는 나를 보고 마주 보며 앉아있던 외국인이 호카곶은 더 멋질 거야 하며 밝게 웃었다. 정말 그가 말한 대로 호카곶은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곳이었지만, 버스를 타면서 지나쳤던 풍경 또한 견줄 수 없다. 마치 짧은 순간들이 소중한 것처럼.


구불구불 작은 마을을 돌아 속이 울렁거릴 때쯤 호카곶에 도착했다. 바람도 딱 적당하고 햇살도 적당해서 기분이 상쾌하다. 작은 문을 기점으로 초점조차 맞지 않는 바다가 열린다.


무한한 재생의 공간을 생각한다. 그 무엇도 어느 것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순간. 펼쳐진 바다와 뜨거운 태양 아래 이대로 끝없이 날아가 버려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서쪽 끝, 땅끝마을이라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이곳 자체로 온전히 대단한 곳.


한참 풍경 사진만 찍다가 문득 홀로 여행 한 달 째 접어든 오늘, 나를 마주했다. 여전히 여행을 시작할 때 가져온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여행하며 달라진 거라곤 조금 살찐 손가락과 그을린 손등, 여행 중에 순간적으로 잘라버린 앞머리의 길이, 이제는 뭐 어때 싶은 마음가짐. 이 시간을 온전히 기록하고자 나를 남겼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why not? sure! 그리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편지를 쓰고 일기를 썼다. 무언가를 남기는 것. 하루의 감정을 잡아내는 것. 그때의 시간을 저장하는 것은 사소한 듯 참 괜찮다. 석양 무렵, 바람이 세지도 않고 하늘은 끝없이 맑고 펼쳐진 바다는 깨끗하고 태양은 뜨거웠다.

호카곶에서 해가 질 때쯤 카스카이스로 돌아왔더니 밤이 훌쩍 넘었다. 저녁을 먹고 잠시 바닷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다가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매일 같이 지나다니며 보는 카이스 두 소드르 역 주변 광장인데, 애잔하다. 그래서 오늘 밤까지만 있으려던 리스본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정말 이 계획 없는 여행은 언제까지 계획이 없을지 계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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