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맥주 한 잔이 필요한 풍경들

- 리스본에서 파로 여행 -

by 임선영
@Faro, Portugal


일주일을 리스본에 머무르면서 못 가본 곳도 많은데 왜 갑자기 파로에 가겠다고 결정했는지 모르겠다. 만약 어젯밤 잡아놓은 파로 호스텔이 환불 불가가 아니었다면 아침에라도 리스본에 더 머무르겠다고 할뻔했지만, 일단 출발. 여유롭게 오후 2시쯤 기차를 타기로 했다.


Oriente 역 티켓 창구. 파로행 티켓을 달라고 했더니 대뜸 몇 살 이냐고 물었다. 나? 내가 몇 살이었지. 이때까지도 내 나이가 낯설어 10초 정도 눈을 굴리고 나서야 스물여섯이라고 대답했다. 스물다섯이면 할인받을 수 있는데 아쉽다는 그의 말에
'아냐아냐 한국에서 스물여섯이고 여기서는 스물다섯이야. 나 할인받을 수 있어!'

라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빠르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제대로 설명해보라고 할까봐 진땀 빼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고 할인된 가격으로 티켓을 끊어주었다.


리스본에서 파로, 파로에서 리스본으로 다시 오는 기차. Carr:24, Lug:112. 24번 칸, 112번 자리. 24번 맨 끝 칸에 112번 맨 뒷자리 좌석이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며 바깥 구경을 즐겼다. 세 시간을 달리는 동안 수십 편의 풍경이 바람에 날리는 책장처럼 넘어갔다. 상큼한 과일이나 시원한 맥주 한 잔이 필요한 풍경들.


여행이 길어지면 많은 것들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행이 길어질수록 모든 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되어버렸다. 분명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도 갖고 있는 짐들이 버겁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가벼워질 수 있는 순간이 있겠지.


다섯시 반쯤 도착해서 기차역을 나와 숙소를 찾아가 볼까 하고 캡처해놓은 화면을 보고 고개를 들었는데, 세상에, 바로 찾았다. 기차역에서 1분도 안 걸리는 호스텔 덕분에 아주 쉽게 짐을 내려두고 기찻길을 따라 걸었다. 심각하게 자유롭고 평온한 곳.


호스텔 주인과 오늘 하루 머무는 사람들 모두 저녁을 함께했다. 직접 만들었다는 샹그리아와 샐러드, 스파게티. 저녁과 대화로 이어진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옮겨갔다. 에스프레소 1샷, 알코올 1샷, 에스프레소 1샷, 알코올 1샷, 에스프레소 1샷, 알코올 slowly 맛을 음미하며 1샷. 순서대로. 생각보다 괜찮은데라며 말끔하게 끝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지러움을 느끼고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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