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하나하나를 보며 걷는 삶

- 라고스 해안 절벽 여행 -

by 임선영
@Lagos, Portugal


엄청난 햇살에 기분이 좋아져서 방 안에 걸어두었던 빨래들은 전부 밖에 걸어두고 그동안 쌓인 먼지를 소독했다. 침대 시트도 재정비하고 누워서 발가락을 움직여보니 새로 들어온 공기가 스쳐 기분이 좋다.


물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몸에 고기와 비타민을 가득 넣어두고 이전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쓰던 아르헨티나 아이가 추천해준 곳을 가보기로했다.


시기는 가을인데도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햇볕이 뜨거운 오후에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해변에서 태닝하며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당장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꿋꿋하게 갔다가 돌아올 때에 첨벙 뛰어들기로 다짐했다.


평탄하게 걸어갈 수 있는 도로가 있었지만 과감히 해안절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평지와 굴곡이 반복되며 방향이 표시되어 있지도 않은 길 위에서, 나의 숨소리와 지나가는 새의 날갯짓 소리로 채워지는 해안 절벽 위에서, 머리를 감싸는 햇빛의 뜨거움으로 높이를 가늠해보는 그 위에서 나는 산티아고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다.


해안절벽에 길이 있을까 싶은데 밟고 밟아 길이 있었고 이게 길인가 싶을 만한 좁은 곳인데도 다른 곳은 그대로 절벽이라 오로지 그곳으로만 지나가야 했다.


그렇게 멀리서 조금씩 보이는 등대에 도착하자마자 무턱대고 우뚝 솟은 곳으로 향했다. 바로 옆 언덕에서 보이는 아주 작은 사람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위는 나 혼자만의 공간.


문득 어디서 많이 봤는데 싶어서 가방을 뒤적였고, 라고스 시내에서 한국으로 보낼 엽서를 고르다가 단번에 마음에 들어 나에게 주는 선물로 챙겨두었던 엽서를 꺼내들었다. 엽서를 눈 높이에 맞춰 똑바로 들자 엽서의 끝을 넘어 그대로 이어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여기 여기 여기 정말 내가 서 있는 거구나! 이 엽서에 있는 곳과 똑같은 곳에 내가 서있는 거구나! 그저 앞만 보고 걸었을 뿐인데!'
아낌없이 똑같은 풍경을 보여준 이곳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아낌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무 계획이 없다는 말은 무책임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든 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마음가짐 속에 있는 믿음의 의미였고 그걸 깨달은 지금은 어떠한 고민도 걱정도 사라짐을 느꼈다.


지금처럼 어떤 길을 가게 될지, 길이 아닌 길을 걷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지만 적어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명(自明)'의 방법뿐 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길을 걸어가며 눈앞의 소중하게 지나가는 모든 풍경들에 감동하고 남들은 다 알아버려서 시시하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들에 반응하며 살고 싶다. 물론 매 순간 마냥 감동하며 살 수는 없지만 쉽게 정해진 방향을 뒤로하고 빨갛게 칠해진 무언의 방향이 서 있는 길로 가고 싶은 마음. 빠르게 지나쳐서 재미없는 시간을 지내야 하는 삶보다 고개를 돌려가며 하나하나를 보며 걷는 삶.


예를 들면 라고스에서 일주일 넘게 지내면서 걷는 동안 스쳐 지나갔던 풍성한 레몬 나무와 우체부 아저씨 키만큼 아담했던 어느 집 대문과 나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며 놀았던 강아지 두 마리와 골목 사이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할머니들의 대화. 그리고 데칼코마니 같던 새하얀 집들.


두시쯤 앉아있었던 곳에 여섯시쯤 다시 돌아와 앉았다. 1시간이 걸릴 거라던 여정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났지만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파도소리가 느릿해지는 지금, 오면서 말라버린 발등 위로 신었던 샌들의 그림자가 깊게 새겨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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