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엽서를 쓰는 적당한 시간

- 라고스 해변 여행 -

by 임선영
@Lagos, Portugal


남은 잔액을 확인하고 아직은 그래도 견딜만하구나, 안심했다. 오늘은 온전히 라고스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골목에서 보내기로. 여러 골목으로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골목길이 수두룩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에서 어제 해안절벽을 따라 걸으며 만났던 여자들을 우연찮게 다시 만났다. 그들의 얼굴을 기억했다기보다 그녀의 말투 그리고 그녀의 발찌를 보고. 똑같이 말 많은 여자와 똑같이 그걸 다 들어주던 여자. 나무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눈 밑에 그림자가 생겨 아른하다.

철저히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벗어나보려고 무작정 위로 올라갔다.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학교를 기점으로 참 조용한 주변.


풍성한 레몬 나무와 우체부 아저씨 키만큼 아담했던 어느 집 대문. 나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며 놀았던 강아지 두 마리와 골목 사이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할머니들의 대화. 데칼코마니 같던 새하얀 집들.


한참을 서 있었다. 쉽게 방향이 정해져있지만 왠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 끝을 넘어 바다가 보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는 슈퍼에서 콜라를 사고 바다로 향했다. 매일같이 보는 광장이지만 오늘따라 새로운 건 마지막이라는 기분 때문이겠지.


가까운 해변에 자리 잡고 드러누웠다. 새까맣게 타버려도 좋으니. 나도 해변을 즐기고 있다! pm 3:50 머리를 대고 누워 뜨거우면 뒤집고 뜨거우면 뒤집고 반복. 진짜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속을 따뜻하게 가득 채웠다.


바닷물이 차가워서 수영은 못했지만 발을 적시며 모래에 또 나를 새기며 바닷물에 쓸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꾸 비교하려 하지 말고 그냥 내가 나 다우면 된 거다. 자꾸만 쓸려가는 것 말고 굳건히 설 수 있는 내가 되기를 바라면서.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에 앉아 마지막 남은 포르투갈 엽서에 마지막 남은 포르투갈 우표를 붙여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 엽서는 안전하게 도착할까 싶어서 마지막 남은 우표로 보낸다. 내일 새벽이면 배터리를 찾아준 사람을 만나러 스페인 세비야로 넘어가. 그 일이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 만큼 이곳이 너무나 좋아.

딱히 관광지도 아니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적당함이 가득해서 좋아. 할 일 없이 걷기에 골목이 적당하고 바닷가 근처에 산책하러 가기도 적당하고 지내기에 물가도 적당하고 매일매일 둘러봐도 새로운 곳이 생기는 적당한 즐거움이 있어. 가만히 앉아 이렇게 엽서를 쓰는 적당한 시간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최고 예쁜 하늘을 마지막 날 보여준 라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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