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비야 카우치 서핑 여행 -
@Sevilla, Spain
비가 이상하게 쏟아지는 아침, 카우치서핑으로 찾은 호스트가 한시 안에는 집에 왔으면 좋겠다고 했기에 이런 날씨에도 지체 없이 걸어야 했다. 우산을 써도 소용없는 양의 비가 쏟아지는 길을 헤매다가 아무 데나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나서야 와이파이를 얻을 수 있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보니 고작 7분 거리에서 계속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그에게 연락을 하고 이미 젖어버린 가방을 바라봤다. 괜한 오기를 부리는 바람에 비를 고스란히 전부 맞았다고 생각하니 잔뜩 열이 올랐다. 그렇다고 잠깐 머무른다고 그칠만한 비가 아니었다. 아직도 식지 않은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씩씩하게 마시고 출발하는 수밖에.
모르는 누군가의 집에서 머무른다는 사실은 새롭긴 했지만 한편에 두려운 마음을 잡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서야 도착한 그의 집, 그가 건네준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서야 젖은 몸이 풀렸다. 이미 그의 집에서 카우치서핑 중이었던 처음 보는 사람들과 간단히 얘기를 나누며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카우치서핑 호스트인 그가 일을 하느라 밤 아홉시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우리는 뭘 할까 하다가 무작정 뭉게구름 속을 걷기로 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계속 흥얼거리며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가 벤치에 앉자 갑자기 깊은 눈동자를 보이며 모르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친근함을 느꼈다기보다 모르는 사이이기에 모든 걸 털어놓아도 괜찮을 거라고 짐작했다. 남자친구의 헤어지자는 통보에 무턱대고 짐을 챙겨 스페인으로 날아왔다고. 한동안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도 그녀는 와이파이가 연결될 때마다 미국에 있는 친언니와 통화하려고 애썼다. 그런 그녀 앞에서 나도 슬그머니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어차피 공기 중으로 사라질 소리일 테니까.
우리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골목을 방황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갈 때 앞장서서 걷던 그녀의 발걸음을 보았다. 하나 남은 워커로 버티고 있다던 그녀의 신발 밑창은 다 닳아있었다. 정말 새로운 걸 사고 싶다며 소리를 지르는 우리였지만 역시 옷, 신발, 화장품에 쓰는 돈을 아까워했다.
피에스타가 지나고 타파스를 먹으며 맥주를 마셨고, 흥이 오른 그녀는 공원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분명 고성방가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동참하며 더 큰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은근슬쩍 모인 굉장히 이상한 조합으로 동네 바에 자리를 잡고 0.60유로에 맥주를 시켰다. 그녀와 나는 카우치서핑에서 둘 다 여행자로 만났고, 세비야에서 요리사라는 아이는 친구와 자전거를 타다가 아프리카에서 공부하러 온 아이를 만났다고 했고, 아프리카에서 온 아이는 순식간에 자신의 친구에게 연락해서 결국 총 여섯 명. 영어와 스페인어가 오갔다. 사실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라 가끔 영어가 나오지 않을 때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가졌다. 오랜만에 꽉 찬 달.
맥주에 흥이 오른 달빛 가득한 밤, 구름 사이로 별도 살짝 보이는 밤,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하루를 정리했다. 그녀는 구석에서 기타를 꺼내 흔들흔들 소리를 만들었고, 그는 내가 잘 곳을 만들어주며 이부자리를 재정비했다.
분명 난 집에 도착하면 눕자마자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의 향기. 그가 켜 놓은 작은 초가 만들어낸 사물의 그림자. 모든 걸 그대로 기록하고 싶은 종이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