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기를 쓰고 쏟아지는 햇빛

- 세비야 카우치서핑 여행 -

by 임선영
@Sevilla, Spain


세비야에 있는 대학교 구내식당에서의 점심. 그를 따라 지금까지 세 곳의 각각 다른 대학 식당을 돌아가며 가봤는데 비싸야 4유로 조금 넘는 가격에 근처 식당보다 훨씬 맛있었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나를 위해 통역도 해주면서 음식 하나하나를 설명해준 덕분에 맛있는 학식을 먹었는지도. 가끔 어리둥절한 동양 여자애를 위해 식당 아저씨는 시키지 않은 메뉴를 먹어보라며 선뜻 담아주기도 했다.


오늘도 그는 점심을 먹고 세비야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갔다. 손을 흔들고 신호등을 건너려는 찰나,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름의 움직임이 빠르게 흔들렸다. 사진을 찍는 중에 지나가던 사람이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여행 중이야? 혼자? 세비야 괜찮아? 다음에는 어디 갈 거야?'
'나도 몰라. 계획이 없거든.'
'때로는... 계획이 없는 게 좋은 것 같아. 즐거운 여행이 됐으면 좋겠어!


그리고 손을 흔들고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또다시 눈이 흔들렸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맑아져 기분이 좋아졌다.


잔뜩 기를 쓰고 쏟아지는 햇빛, 오후 세시. 골목이 많아 길을 자주 헤매었던 길들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그동안 걸어 다니면서 본 레몬 나무가 오렌지 나무라는 걸 알게 됐다. 아직 익지 않아서 푸르지만 땅에 떨어지는 1월이 되면 다 모아서 영국으로 보낸다고 했다.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위해.


거대한 버섯 모양 구조물이 있는 광장에서부터 세비야 대성당까지 가는 길은 작은 상점들이 즐비한 쇼핑거리. 여행 시작하고 옷을 사본 적이 없는데 지나가는 동안 큰 돈 쓸 뻔했다. 입어본 니트의 퀄리티가 조금 더 좋았더라면, 세비야가 조금 더 추웠더라면 샀을 텐데. 쉽게 내려놓지 못한 목도리. 짐이다. 짐. 더 많이 보기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은 사지 않기로 했다.


분수에 걸터앉아 흥얼거리다가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갔더니, 그가 선물이라며 수제 맥주를 내밀었다. 지나가는 길에 마주친 수제 맥주병이 예쁘다고 문득 말했었는데, 세심한 사람. 주변 이웃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둔 채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나무 상자를 드럼 삼아 놀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길에서 주워왔다던 보드판을 꺼내와 방 문에 걸어놓을까 아니면 분해해서 벽에 액자로 걸어놓을까 물었다.


맥주를 마시다가 보드에 써진 글씨를 지우고 톱질하고 사포질하고. 한참을 작업한 후에 밤 문화를 즐겨 보자며 알라메다 광장으로 나섰다. 마치 홍대 밤거리를 걷는 듯한 곳. 이전에 머물렀던 다른 친구들까지 모여 몇 시에 들어와서 잠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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