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걷는 동안 너무 좋았어

- 세비야에서 론다 여행 -

by 임선영
@Ronda, Spain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날. 세비야를 떠나는 날. 기분이 상쾌하거나 좋지도 않고 그냥 그랬다. 가방을 메고 신발을 갈아 신으면 조금은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있는 제일 밝은 색 옷으로 갈아입었더니 그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제일 좋다고 말해주었다. 어김없이 아침에 그는 두유에 시리얼을 부었고 나는 그냥 과자처럼 컵에 담아 먹었고, 그는 큰 맥주컵에 나는 머그잔에 차를 따라 마시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름 마지막이라고 테이블도 닦아주고 거실도 빗자루로 청소해주고 나니 깨끗하다. 며칠 지내는 동안 크리스는 본인의 물건을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원치 않아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허락된 지금. 사진 찍느라 이것저것 세팅해놓으니 크리스가 또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너 아트 사진 찍는구나?'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까지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던 카페에 인사도 할 겸, 홀로 작업을 하러 나왔다. 한 블럭 골목을 돌아 나오면 알라메다 광장. 그리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자연스럽게 카페에 도착해 작업을 하고 론다 숙소도 예약하고 마지막으로 카페 주인과 인사를 했다. 카페를 마음에 들어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오히려 고마운 사람은 난데.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했지만 나중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세 시쯤 크리스와 만나 점심을 먹고, 포르투갈에서 왔던 Armas 버스터미널이 아닌 Prado 버스터미널에 가서 론다 행 버스를 탔다. 직행버스가 아니라 조금 저렴한 12.70유로. 다섯시에 딱 맞춰서 기다리는데 다섯시에 딱 맞춰 버스가 도착했다. 경유하는 버스라 그런지 사람들이 꽉 찼지만 어느 지점에서 한꺼번에 내려서 나중에는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두 시간 반을 넘어 세 시간 정도 달렸을까. 어둑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중에 갑자기 거리에 불빛들이 늘어났고 론다에 도착했다. 여덟시쯤 도착했는데도 버스터미널 주변으로 가로등이 있어 무섭지 않아 다행이었다.

늦게 도착한 호스텔 맞은편 슈퍼에서 간단하게 먹을 걸 사 와서 먹는 동안 한 달 반의 까미노, 순례길을 마치고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 스페인 남부를 여행 중인 아저씨와 얘기를 나눴다. 순례길 덕분에 다이어트 했다며 예전 사진을 보여주었다. '내가 순례길을 걸으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 전부 각자 개인적인 문제를 가득 안고 순례길을 걷더라고. 덕분에 다이어트까지 했지만 걷는 동안 너무 좋았어. 네가 걷는 걸 좋아하고 진정 자연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까미노 정말 좋을 거야.' 그리고 여행이 길어지면 일상이 되면서 어느 날은 기분이 무진장 좋고,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누워만 있고 싶을 만큼 차분해지는 게 당연하다고. '내가 지금 그래.' 라며.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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