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론다 협곡 여행 -
@Ronda, Spain
꽤 오래 여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두 달을 향해 달리고 있다.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라고 여기니 괜찮다. 이게 그냥 이거라고.
어젯밤 누에보 다리 밑 협곡 사이를 보며 다짐했던 일을 실행하려 짐을 챙겼다. 어제보다 먹구름은 더 잔뜩 꼈고, 바람은 더 휘몰아쳤지만 직진했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넘어오자 건물이 조금씩 사라지며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졌다. 그리고 비가 계속해서 굵어지며 가방마저 무거워졌다.
스쳐 지나가는 벌레도 안 보일만큼 쉽지 않은 길. 바람에 우산이 부러지고 어디쯤 왔는지 가늠하기 힘듦이 지속되다가 평탄하던 길이 사라지며 호스텔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거의 다 왔으려나. 한 숨 돌리고 걸어온 만큼을 더 걸어 드디어 도착했다. 협곡 속에 위치한 산장 같은 알베르구에 로스 몰리노스.
이미 젖어버린 옷가지를 늘어놓고 비가 그칠 때까지 난로 앞에서 기다렸다. 구시가지를 통해 오는 길 외에도 론다 중심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주인 아들의 말에 단단히 껴입고 이번에는 다른 길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뒷동산을 오르듯 작은 입구를 통과하면 좁은 산길. 그곳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하며 절벽 끝에 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굉장히 중요하며, 한 번 내린 결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동네 한 바퀴 돌고 카페에 앉아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레스토랑. 큰 컵에 맥주 한가득 채워놓고 타파스를 먹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친척들끼리 떠났던 첫 유럽 여행을 떠올렸다. 식어버렸지만 밤에 잠들기 전 우리끼리 한 방에 모여 떠들면서 먹은 감자튀김과 융프라호 작은 가게 주인 할아버지가 상자를 뒤적이며 건네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프랑스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여름방학용 숙제를 위해 사촌 언니따라 그대로 썼던 일기장.
여행이 길어지다 보니 멋진 풍경보다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순간이 짤막 짤막 떠오른다. 언제 다시 또 같이 떠날 수 있을까 싶은 밤, 다시 비가 쏟아졌다. 곧 그칠 줄 알았던 비는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그대로 발이 묶여 앉아있는데 정말 우습게도 절벽에서 내가 사진을 부탁했던 그 사람이 지나갔고, 짧게 눈인사를 나누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뒤로해 우산을 접으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해?'
'비가 와서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야.' 일곱시 사십분 버스로 말라가에 가야 하는 그는 한 시간 반 정도 남은 시간을 나와 같이 커피를 마시며 얘기하다가 이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으니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밖을 나서는 순간 우산을 써도 쫄딱 젖는 마당에 좁은 돌 산길을 내려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건 나 혼자로 족했다. 우산을 금방 사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그의 우산을 빌려 재빠르게 우산을 사 왔다.
심호흡. 이미 무릎 아래로는 다 젖었고 호스텔까지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구시가지를 통해 오래 걸리느냐, 산길을 통해 조금 더 빨리 가느냐. 어느 쪽이든 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이 밤에 위험하고 무서웠지만 선택을 해야 했다.
오로지 아이폰이 뿜어내는 불빛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뻗을 때마다 미끄러질까 조심해야 했고, 살짝 미끄러질 때마다 '아냐 괜찮아'를 크게 외치며 나를 다잡아야 했고, 온 마을이 다 보일 만큼 강하게 번뜩이는 번개에 그대로 멈춰 서서 눈을 크게 뜨고 제발 넘어지지만 않기를 기도해야 했지만 번개가 칠 때마다 보이는 론다의 전경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멋있었다고 회상하지만 그 당시 카메라는 비닐봉지로 꽁꽁 싸매고 품에 꼭 안아 의지해야만 했다.
작은 점으로 보이던 호스텔 불빛이 가까워져오면서 긴장이 풀렸고 호스텔 주인 부부가 달려 나오며 왜 전화를 안 받았냐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다며, 그래도 무사히 잘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손을 잡아주었다. 어떤 말을 했는지도 모를 만큼 손이 떨렸고, 온 근육이 떨렸고, 뇌의 회전이 멈췄다. 벽난로 앞에 앉아 건네주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실소가 터졌다. 무모한 도전이라니. 그날 밤 협곡 사이로 나는 사라지는 줄 알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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