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드리드 가을 여행 -
@Madrid, Spain
원래는 그라나다에서 머물면서 근교에 들려 트래킹도 하고 세비야에서 자주 갔던 북 카페 주인이 추천해준 곳도 가보면서 더 오래 머무르려고 했는데, 충동적으로 마음을 바꿔 팔마 마요르카에 가기로 했다. 비행깃값이 저렴하게 나온 것도 있었지만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최대한 빨리 바다로 가고 싶은 마음에 숙소비도 아낄 겸 마드리드까지 새벽 버스 감행하기로 했다. 밤 열한시부터 공항 노숙 아닌 버스터미널 노숙. 슬쩍 잠들었다가 깼더니 새벽 1시 14분에 14도다.
짐을 챙겨들고 플랫폼으로 가서 메일로 받은 버스 티켓 캡처화면을 보여주었다. 예약 프린트를 안 해서 문제가 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기사 아저씨가 천천히 화면을 확대하더니 웃으며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어차피 다섯 시간 가는 동안 잠만 잘거라 normal 버스를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서 놀랐다. 영화도 볼 수 있고 usb 연결할 수도 있고 와이파이도 쓸 수 있고 무엇보다 쾌적하다. 하지만 다 필요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안대를 쓰고 잠이 들었다. 중간에 휴게소도 들렸던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어느 순간 마드리드에 도착해있었다.
멍하게 버스에서 내린 몸이 찬 공기와 부딪치며 부르르 떨렸다. 이제는 버스 터미널에서 호스텔까지 찾아가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버스를 타기 전 와이파이를 연결해서 찾아봤을 때 렌페를 타거나 버스를 타라는 경로뿐이라 도착해서 물어보면 어떻게든 가겠지 싶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다 잘 되던 감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막상 지하철 노선도를 봐도 모르겠고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무작정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편하다. 지하철 안내원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알아서 척척 지하철 표도 끊어주고 작은 지하철 노선표도 쥐여준다. 버스터미널과 바로 이어지는 지하철 6호선 Mendez Alvaro 역에서 한 정거장인 Pacifico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탄 뒤 Vodafone Sol 역에서 내리면 끝. 아마 추위에 잠을 많이 자서 머리 회전이 멈췄나 보다.
새벽 공기와 마주쳐 온몸이 깨끗해지며 맑은 별까지 보인다. 아직 살짝 남은 추위에 옷을 여미고 십여 분을 걸어서 호스텔 문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24시간 리셉션이라 유리문을 똑똑이는 소리를 들은 직원이 차가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숙소비 지불하고 소파에 죽은 듯 앉아있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오늘 조식은 미포함이지만 그냥 먹어도 되라며 찡긋 웃어 보인다. 따뜻한 커피를 가득 담아들고 뉴텔라를 잔뜩 바른 토스트 베어 물고 밝아오는 날을 맞이했다.
아침이 되자 점점 말짱해지는 정신에 오랜만에 화장을 곱게 하고 먼지 탈탈 털고 밖으로 나섰다. 마드리드에는 유명한 솔 광장이 있었지만 휴식을 위해 레티로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다양한 편집샵과 감각적인 카페들을 구경하느라 휴식은 사라졌지만.
자라홈 같은 리빙샵에서 저렴한 가격에 작고 귀여운 별 모양 트리 전구를 사고 골목 사이사이 위치한 빈티지 샵을 돌아다니다가 빨간 열매와 잎사귀가 달린 목걸이를 구매했다. 메이드 인 마드리드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마드리드를 나타내는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전구와 목걸이를 볼 때면 마드리드에서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떠오를 것 같았다.
새로 산 물건을 들고 신나게 공원으로 걸어가는 중에 말을 탄 경찰이 지나쳐갔다. 그들은 말 위에서 분명 위풍당당 했는데, 실은 말을 타고 순찰하는 동안 나 같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으면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위엄 있던 그들의 뒷모습이 진땀 흘리며 쏜살같이 사라지려 애쓰는 모습으로 보이자 웃음이 났다.
프라도 미술관을 지나 진땀 빼며 도착한 공원. 가을이 오지 않을 것 같던 스페인에 가을이 도드라졌다. 노란색이었던 나뭇잎들은 이제 바람이 불면 곧잘 휘날리며 떨어져서 사진을 찍으면 화려함보다는 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가을바람이 떨어뜨린 낙엽을 긁어모으는 청소부원들. Gracias, 가을을 주워줘서. 물기가 남아있는 잔디 대신 벤치에 앉아서 햇빛을 만끽했다.
돌아가는 길 공원 뒷문으로 나가서 마주친 오래된 책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진부한 표현이지만 진정 맞는 말인가 보다. 늘어놓은 오래된 책 앞에서 한참을 뒤적 뒤적이며 느릿느릿 걸어내려왔다.
그길로 호스텔에 돌아와 침대에 올라서자마자 잠이 들었고 저녁 시간쯤 잠에서 깨어나 간단히 머리만 묶고 저녁을 먹으러나갔다. 그때 문득 모든 상황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누워서 잘 수 있는 침대가 있음에, 짐을 줄여도 생활에 지장이 없음에, 이렇게 적응해 갈 수 있음에. 그리고 커피 한 잔이 1.20유로 뿐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