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어를 할 줄 안다

- 도쿄 다이칸야마 여행 -

by 임선영
@Tokyo, Japan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는 종일 더 굵어졌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있는데 몸이 지쳐있는 것 같아서 오늘은 조용히 작업을 하고자 6층으로 올라갔다. 비 오는 소리가 가득할 만큼 조용하고 밝았던 공간, 사과를 씻고 자리를 잡았다. 비 오는 소리가 들리고 살짝 아련하게 음악소리도 들리고 만족스러운 쉼 시간을 위해 꽂혀있는 책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역시 아침에 사과 한 개는 무리였는지 금방 배가 고파져서 짧은 쉼 시간을 즐기고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크루아상과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고 항상 앉던 3번 책상에 자리 잡고 앉아서 남아있던 작업을 마저 끝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가기 전 마지막 날까지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기로 했던 일정을 바꿔서 군마에 거주하고 있는 사촌 오빠 집에 놀러가기로 결정했다.


비가 와서인지 느렸다가 흐렸다가를 반복하는 바깥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서 결국은 참지 못하고 옷을 챙겨 입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오늘 같은 날에는 길다란 투명 우산을 쓰고 비가 우산에 닿아 시야가 살짝 흐려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빌려주는 투명 우산을 들고 빙빙 돌려가며 어디로 가볼지 고민하다가 왜 갑자기 오모테산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오모테산도에 갔고 역에서 내려 한없이 걷다가 이내 나카메구로로 옮겨갔다.


봄이면 나카메구로 중심에 있는 다리를 따라 흘러가는 벚꽃이 가득하다는데 봄비도 아닌 가을비가 내리는 날 다리를 건너면서 내려다본 물은 홍수 그 자체였다. 칠레 지진으로 쓰나미가 온다더니, 빠르게 휘몰아치는 강은 느릿한 나카메구로와 어색하게 적절했다.


비가 와서 오히려 더 한적한 골목 사이를 지나 비주얼 서적을 셀렉하고 판매한다는 서점을 향해 추적추적 걸었다. 하지만 나카메구로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책방은 하필 'will be closed until oct.11th'. 힘들게 걸어간 곳이었는데 상심한 채 겉모습만 기웃거리며 바라봐야 했지만 덕분에 다이칸야마까지 걸어갈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하루 종일 너무 오래 걸었던 탓인지 다리도 아팠고 간단하게 저녁도 먹을 겸 다이칸야마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바로 보이는 아담하고 아늑한 구조의 가게에 들어가 주방 조리기구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일본어 메뉴판을 받아들고 잠시동안 당황해서 혹시 설명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나보다 더 당황해하는 직원의 낯빛이 보였다. 그동안 일본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별 탈 없이 지내서인지 막상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만나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편하게 통역을 해줘서 주문을 완성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난 한국인이야.'
'아, 한국에서 일 한 적 있어. 한국말 아주 조금 할 줄 알아.'
'정말? 무슨 일했는데?
'인테리어 디자이너야, 폴 바셋 알아?'

다이칸야마 골목 작은 식당에서 폴바셋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만날 줄이야. 음식이 나오고 맥주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영어로 얘기를 이어가면서 그나마 내가 조금 아는 일본어와 그녀가 조금 아는 한국어로 대화의 감칠맛을 더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직원들은 그녀의 통역으로 대화에 참여했고 2주 전 홍대에 갔다 왔다던 직원은 내가 홍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한글을 읽을 줄 알지만 뜻을 잘 모르는 그와 일본어를 읽을 줄 알지만 뜻을 잘 모르는 나는 그녀의 영어 덕분에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일 그만두고 사진을 찍고 싶어서 여행을 시작했어. 앞으로의 계획은 없고.'


그녀 역시 오래전 일을 그만두고 두 달 동안 시애틀에 계획 없는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계획이 없다는 건 참 좋다면서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라는 말도 함께. 서로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그녀는 'If you don't mind'라고 제안하며 나와 함께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 걸어주었다. 다이칸야마 근처에 산다는 마흔 여섯의 그녀는 걷는 동안 나에게 주변 곳곳을 설명해주며 새로 생긴 괜찮은 맥주 공장과 츠타야 서점을 추천해주었다. 고마운 사람.

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참 괜찮은 일이다. 그리 유창하지 않아도 지난 시간을 공유하거나 또 다른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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