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요르카 골목 여행 -
@Palma de Mallorca, Spain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자연스럽게 눈을 떠져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오후를 넘긴 한국 시간, 엄마는 김치를 담근다고 했다. 딸이 좋아하는 깍두기가 잘 됐으니 빨리 먹으러 오라고 했을 때가 여행 초반이었는데, 그새 다 먹었다며 진짜 맛있었는데 아쉬워하는 엄마.
매년 외할머니가 보내온 김치를 받으며 힘들다면서 또 보냈다고 잔소리하던 엄마가 힘들다면서 나를 위해 김치를 담근다. 한꺼번에 많이 하려니 힘들지라고 나도 잔소리를 해봤지만 전혀 개의치 않아 할 엄마라는 걸 알기에 곧 갈 거야라고 말하며 끊을 수밖에 없었다. 투정 부리고 나서 햇빛을 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지도도 없이 무작정 호스텔 문을 밀고 나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예상했던 자연의 섬 마요르카를 철저히 뒤집는 골목마다 위치한 감각적인 상점들. 섬이니까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겠지 하고 들어선 곳인데 제주도 2배 크기라니, 섬에 있어도 섬에 온 것 같지 않았다. 광장을 중심으로 타파스 바와 온갖 쇼핑거리가 몰려있고 사이사이 뻗어난 골목에는 아기자기한 카페와 빈티지 샵, 핸드메이드 샵 등 구경할 곳들이 많다.
한참을 고삐가 풀려 마구 사들고서 허탈한 마음으로 호스텔 근처 동네 타파스 집에 들어섰다. 맛있는 걸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타파스 집 아들은 영어를 못한다며 아빠를 불렀고, 아빠는 다른 직원을, 그 직원은 또 다른 친구를 불러가며 주문을 받았고, 겨우 그 친구가 하나하나 음식을 설명해주며 친절히 추천까지 해줘서 맛있는 타파스를 먹을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한 할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마요르카는 정말 사람들이 착하고 다 좋은데 제일 큰 단점이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못하는 사람은 아예 못한다는 거야'
'모국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죠, 저도 영어 잘 못해요. 그래도 할머니는 영어 잘 하시네요'
라고 했더니 젊을 적 스튜어디스 하셔서 영어 말고도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가 가능하다는 대단한 할머니. 타파스를 먹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주시더니 궁금한 게 있거나 정말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시고 떠나셨다. 마요르카에 온 걸 환영한다는 따뜻한 말을 덧붙이고. 할머니 덕분에 마요르카가 더 좋아졌다.
배를 채우고 골목을 뒤적이다가 발견한 빈티지 샵에 들어가 기웃거리다가 오늘 1주년이라며 텍 가격에서 10% 더 할인해준다는 주인의 말에 냉큼 마음에 드는 옷 하나를 골라들었다.
'1주년 정말 축하해! 10% 할인도 축하해!'
축하해줘서 고맙다며 엽서 두 장을 챙겨주었다. 마음에 드는 스웨터를 할인해서 산 것보다 더 신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책방.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구경했다. 옛날 영화 포스터가 가득한 파일 속 corea, paralelo 38 혹시 38선을 뜻하는 건가.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장도 훔쳐보고 오래된 삽화 책들을 뒤적이다가 책방 구석 밑에서 우연찮게 1933년 지리학 책을 발견했다.
한국을 찾아볼까 펼쳐 본 지도에는 Corea라고 쓰여있었다. Korea가 아닌 Corea가 새겨진 문서는 마치 책장 서랍에 넣어둔 꾸깃하게 늘어진 돈 같았다. 하지만 신기함도 잠시 세계지도에서도 아시아 부분 지도에서도 동해는 일본해였고, 한국과 일본이 통틀어 일본이라고 적혀있는 문구를 발견했다. 뒷장의 설명을 보니 Imperio del Japon.
맞다. 1933년 시기상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던 대한민국. La Corea, pertenece al Japon 일본의 소유라는 슬픈 문장. 그리고 발행연도 1940년 책에도 el continente asia- peninsula de Corea. 정말 오래된 1920년도 책 지도에도 Chosun은 Imperio del Japon이었다. 괜히 손도 무겁고 마음도 무거워졌다.
해바라기가 놓여있던 호스텔 거실에 잠시 앉아있다가 간단히 맥주를 사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쏟아지는 별은 아니었지만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니 구름 딱 두 덩이와 꽤나 많은 별들이 보였다. 바람이 가끔 발끝을 스쳐갈 뿐 온도에 변화가 없고 뒤에 걸려있는 전구 덕분에 아늑해서 좋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성당이 보이고 왼쪽으로 돌리면 첨탑이 보이며 그보다 높은 건물은 없다. 서울 달동네 옥상에 올라온 것 같은 기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잠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