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유진 Feb 11. 2016

전형적인 음악영화 속, 전형적이지 않은 로맨스

비긴 어게인 (2013)


<비긴 어게인>은 <원스>를 연출했던 존 카니 감독의 차기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원스>를 여태 안 봤다. 하지만 수록곡이었던 'Falling Slowly'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이번에도 OST로 승부수를 던지는 영화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렇다'다.


나의 위시리스트를 줄줄이 꿰차고 있는, 요지경인 세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는 몇몇 영화들에 비하면 <비긴 어게인> 속 카메라의 시선은 특출할 것 없이 평이했다. 박력도 막장도 없는 스토리라인은 같이 보러 간 옆 사람이 요지부동일 때 행여나 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귀를 사로잡혀 영화의 여운을 며칠이고 흥얼거렸다는 것이다. 이쯤이면 생면부지인 감독님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고 싶다.







영화 제목처럼 그들이 다시 시작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세웠던 음반 제작사에서 해고당한 남자 '댄(마크 버팔로)'은 부인과 오래도록 별거 또는 이혼한 상태다.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는 비좁은 아파트에 살며,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술 마시는데 죄다 써버리거나 그 술값을 낼 때조차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다. 한편 작곡가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점점 가수로서의 명성을 얻어 가는 남자친구 '데이브(아담 리바인)'와 함께 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왔지만, 그런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에 처했다.


우연히 바에서 그레타의 자작곡을 듣게 된 댄은 그녀에게 음반을 제작할 것을 제안하고, 그들은 연주자들을 모아 뉴욕의 방방곡곡을 누비며 이색적인 야외 녹음 작업을 시작한다. 이따금 내키는 대로 곡을 쓰고 고양이에게 들려줄 뿐인 여자나, 회의에서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않는 남자. 이렇게 철들기를 거부하는 두 어른이 만나 이루는 하모니는 음악이라는 강력한 공통의 관심사 안에서 금세 연애 감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빈자리가 커 보이는 사춘기 딸의 존재로 인해, 그와 그녀 사이에서 작게 소용돌이치던 기류는 결국 공기 중으로 아련히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라는 제목의 뜻은 '새로운 인연', '가족과의 화합', '음악인으로서의 재기' 등과 같은 영화 속 그들의 상황을 중의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잘 뽑아낸 이 타이틀 이전에, 원제목은 <Can a Song Save Your Life?>이었다고 한다. 너무 길뿐만 아니라, 소리 내어 읽으면 속이 느글거린다. 바뀐 게 천만다행이라며 감독님 볼을 조금 더 세게 꼬집어 주어야 할 것 같다.







결단코 선을 지키고야 마는 여자와, 이를 알고 담담히 가정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모습은 사뭇 예견된 현실인지라, 오히려 뻔하지 않은 픽션이 된다. 이렇다 할 깊은 갈등도 짙은 스킨십도 없이, 조심스럽게 피어오르다 결국 스스로 꺼트리는 연약한 불씨 같은 감정선은 영화나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의외로 기대되지 않는, 현실에서나 지극히 그럴싸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의 전개는 짜인 각본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눈을 뜨며 맞이하는 하루하루처럼 '평이하리라 기대하지만 사실 예측 불가능한' 날 것의 느낌을 풍기고, 그래서 와닿는다. 몇 년 전 텔레비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화를 내다가 유리잔을 깨고, 어처구니없게도 별안간 그 파편에 맞아서 눈을 크게 다치는 현빈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생소한 기분을, 목 끝까지 차오른 이야기들을 눌러 삼키며 대신 짙은 눈빛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 그레타, 아니 키이라 나이틀리를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느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시선과 침묵 속에서 연기와 실제, 필름과 라이브의 경계에 있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두 사람의 러브라인의 클라이막스다. 그 한 장면을 통해서, 흔히 파국으로 치닫는 어느 다른 멜로드라마보다도 더욱 가슴 졸이는 스릴을 느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연한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눈을 현혹하지 않고도 마음을 적시는 영화라 하겠다.


그 밖의 이야기 1.

Maroon 5의 보컬 아담 리바인이 그레타의 남자친구 역할로 등장하여, 영화 음악을 한층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꽤 많은 분량에서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Maroon 5의 히트곡들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만 뮤직비디오나 공연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가 스튜디오에서 노래하는 장면에서부터 목소리로 그의 정체를 알아봐야 했다.


그밖의 이야기 2.

완성된 앨범을 회사를 통해 유통하지 않고 온라인에 단돈 1달러에 배포한다는 부분에서는 과거 Radiohead가 시도했던 음원 판매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밖의 이야기 3.

실제로는 댄과 그레타가 키스하는 장면을 촬영했으나 넣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천만다행도 이런 다행이 따로 없어 감독님 볼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전히 사랑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