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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Jan 30. 2016

여전히 사랑하는 순간

이터널 선샤인 (2004)


상대방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아 그에 대한 마음을 꾸역꾸역 정리해야 하는 차례가 왔던 때를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 헤어짐을 인정할 수도 없는데 우리는 이미 헤어진 사람들이 되었을 때를.


아픈 이별 뒤, 앞으로의 일상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상대의 공백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람들은 그와의 모든 추억거리를, 그게 선물이든 문자메시지든 닥치는 대로 지우고 버리는 일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배신감 등으로 얼룩진 감정은,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그를 나쁜 사람으로 치부하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지난날을 부정하거나 또는 부정당한다고 해도, 사랑의 결말은 그저 ‘마지막 사건’ 일뿐 그 모든 사랑했던 지난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헤어짐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과거의 사진 속 우리는 정말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짐 캐리)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조엘의 오랜 여자친구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그와 크게 싸운 뒤 그와의 기억을 어떤 시술을 통해서 ‘정말로’ 지워 버렸다. 조엘은 혼자 남아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그는 그녀처럼 자신도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꿈속에서, 정확히는 기억을 지우는 과정 중의 환상 속에서 그가 지우기로 결심한 과거의 순간을 펼쳐보게 된다. 이전까지의 장면에서는 서럽게 울거나 분노하는 조엘의 모습을 카메라가 그저 멀찍이서 비추었다면, 그때마다 그의 머릿속을 스쳤을 것들을 드디어 관객이 함께 보게 된다.


그녀가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여자였는지 욕을 해댈지언정, 그가 그녀와 함께 걸어온 애틋하고 소중한 과거는 이미 과거이기에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삭제되는 기억으로부터 그녀를 숨기기 위해 그 속을 바쁘게 헤집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무의식을 가로지르는 그의 의식은 눈 앞에 펼쳐지는 기억들을 왜곡시켜 무질서하고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바꾸어 버린다. 우리가 꾸는 꿈속 세상이 으레 그러하듯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장황한 그의 모험은 때론 낯부끄럽고 때론 어리둥절하며 마치 현대적으로 각색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킨다. 이 부분은 글도 그림도 아닌 영상이기에 꽃 피워진 연출의 백미라고 감히 꼽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랐을만한, 기억을 삭제한다는 공상은 끝내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되려 평범한 이별의 과정을 상기시킨다. 그가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이유는 그 추억들이 즐겁고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지울 수 있었던 기억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기억 속의 존재를 사랑하는 순간을 더해나가는 것과 같다. 일상에서의 이별은 찰나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차양을 덧댄 긴 통로를 걷는 일처럼 여겨지곤 한다.


영화에서는 내 기억이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었지만 감독은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게 가능하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씁쓸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위안 삼으라는 뜻일까. 조엘이 잠에서 깨고 난 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각자 받아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나는 좀 더 슬퍼졌다.


누가 아무리 펑펑 울었다한들, 연출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수건 짜내듯 관객을 울리려고 작정한 영화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막 이별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괴로운 작품임에 틀림없다. 지금이 한 겹의 순간, 아니 한 겹의 뚜껑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는 특히나 그렇다.


그 기억들을 차마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에 공감이 되어서,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언젠가는 애쓰지 않아도 흐릿해져 버리는 자연스러운 상실을 실감하기에 더더욱 마음이 가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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