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포함*
나는 기억력이 나쁘다. 평소에 뭔가를 기억하려는 의지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들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기억이 나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왔다.
영화 <컨택트>는 주인공 루이스가 그녀의 딸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너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는 그녀의 대사가 참 의미심장했다. 애쓰지 않아도 기억하게 된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아름답고 간결한 SF 영화가 상기시키는 어떤 초월적 사유에 관해서, 그 속을 어설프게 두 손 두 발로 헤집어 건져낸 것들을 글로 옮겨 보려고 한다.
판타지는 현실을 초월하지만, 그것은 초월하고자 하는 현실이 여전히 판타지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판타지는 보통 무한히 팽창한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지하철에서 존 발리의 <잔상>을 읽고 있었다. 첫 번째로 수록된 단편 <분지 속에서>는 화성인인 주인공이 폭발석을 수집하러 금성의 사막으로 떠나는 우주여행기였다. 소설 속에서 우주인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신체를 개조했다. “원래 두피는 무릎 아래와 팔뚝으로 옮겨져 있었고, 그곳엔 긴 금발 머리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금성인의 기괴한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자니, 불현듯 어릴 때 혼자 흥에 겨워 몇 쪽 끄적거리다 말았던 막무가내 SF 소설이 떠올랐다. 물론 내 것에는 F만 있고 S는 없었다.
사람들은 판타지를 통해 누군가의 놀라운 창의력이 펼쳐놓은 새로운 감각에 도취되기도 하고, 그가 딛고 선 발아래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는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 닥칠지도 모를 불행한 미래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던 몇몇 공상과학영화들을 떠올려본다. <매트릭스>에서는 인류의 의식이 가상현실에 지배당했고, <가타카>에서는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계급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나의 빈약한 상상력에 의존한 선입견에서,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의 의미만큼은 비교적 단순했다. 지구가 외계에서 온 녀석들과 우정을 쌓거나 전쟁을 벌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컨택트>에서도 인류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바로 그들이 지구를 찾아온 목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열두 곳에 외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비행물체가 내려앉은 것이다.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이론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과 함께 새까만 탄환 같기도 바둑알 같기도 한 그 물체의 내부로 직접 들어간다.
<컨택트>가 각별히 다루고 싶었던 주제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루이스, 정확히는 루이스 개인의 삶이다. 만약 <컨택트>를 한 잔의 차에 비유한다면, 내가 비워낸 찻잔의 바닥에는 그들을 만난 이후, 무엇보다도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져버린 루이스의 인생이 자잘한 점이 되어 흩어져 있다.
그들, 헵타포드의 문자에는 앞뒤와 순서가 없다. 글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 붓에 먹을 찍어 그린 원같이 생겼다. 먹물이 튄 것처럼, 동그라미에서 번져 나온 크고 작은 얼룩이 구체적인 의미를 띤다. 그들이 내는 소리와 문자는 서로 관련이 없다. 영화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헵타포드의 언어가 인류의 그것과 얼마나 근본적으로 다른 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세상을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차원의 언어를 연구하면서, 아니 새로운 인식의 체계에 익숙해지면서 루이스의 의식에는 뜻밖의 장면들이 끼어든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정해진 미래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몇 개월, 몇 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게 되고,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이 힘겨운 작전 또한 결국에는 무사히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해진 미래를 따름으로써 그녀는 작전 캠프에 닥친 위기를 해결한다. 그들은 홀연히 지구를 떠난다. 이때 루이스가 해낸 일은 어쩌면, 그저, 잠시 인류를 대표하게 된 지적 생명체로서의 지당한 사명감이 동했을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가올 개인적인 삶의 고통도 예정된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이것은 별로 당연한 일이 아니다. 다만 앞서 얘기했던, 그녀가 그 모든 순간을 기억할 이유를 설명해줄 만한 선택이기는 하다.
루이스의 삶에는 커다란 슬픔이 있다. 사랑하는 딸을 불치의 병으로 잃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처럼 보였던 이 이별은 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속에 있었다.
의지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 불확실한 미래가 얼마나 자주 사람의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지, 잠시만 생각해보면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깜짝 놀랄 만큼 많다. 작년의 나는 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는 노인에게 지폐를 쥐어주고 운세가 좋다는 말을 들어 괜히 우쭐해했다. 얼마 전의 나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씩씩하게 미간에 아이크림을 바르고 잠을 청했다. 어제는 돈 많이 벌어서 건물주가 되겠다는 친구의 장래희망을 듣고는 당장에라도 입주할 세입자처럼 즐거워했다. 길이 미끄러운 날에는 괜히 유난을 떨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벨트를 챙겼고, 길이 미끄럽지 않아도 가끔 석연치 않은 이유들로 슬퍼져서는 슬그머니 사랑한다는 말을 잔소리와 함께 덧붙이곤 했다.
그들이 루이스에게 남긴 선물은 마치 한 쌍의 거울 같다. 거울에 비친 거울은 반복된다. 나는 즐거운 경험은 반복되기를, 행복한 시간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평범한 바보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들이야말로 쉽게 그 빛을 잃는다.
순간이 반복되면 고통도 돌아온다. 즐거울 때 최대한 즐거워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게 어떤 순간이든 활짝 열고 받아들일수록 더 찬란해질 것이다. 루이스에게도 그것이 다시 겪어도 좋을, 상실을 감수할 만큼의 기쁨이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반복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 안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지나가는 것은 곧 흘러가는 것이 되고, 무수하고 흔한 것들은 나중에 가서는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희미해진다. 끝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끝이 있어야만 반짝거린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