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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Feb 04. 2018

과거의 망령

블루 재스민 (2013)

여기 돈과 가정을 모두 잃은 여자가 있다. 이 비련의 주인공은 겉모습은 여전히 우아하지만 정신을 약간 놓아버린 탓에 종종 아무데서나 혼잣말을 지껄인다. 세련된 외모의 귀부인이 우두커니 선 채 초점 없는 눈과 상기된 뺨으로 어딘가를 향해 분노하고, 그걸 본 사람들이 움찔하며 슬금슬금 그녀를 피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영화. 우스꽝스럽지만 쉽게 웃을 수 없는 이런 장면들이 코미디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미요소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짝 맛이 가버린 여자를 다룬 비슷한 영화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있었다. 느낌은 많이 다르다. 마츠코가 일대기였다면 재스민은 단막극이랄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를 향한 시선에는 왠지 보는 이가 함께 부담해야 할 작은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블루 재스민>에는 그런 게 없다. 아무도 재스민의 구원에 관심이 없어서다.


영화는 재스민이 혼자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를 타고 동생 진저의 아파트를 찾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뉴욕에서 최상류층으로 살고 있었던 그녀가, 어떤 사연으로 인해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혼하느라 대학도 중퇴했고, 잘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하는 자선사업이 유일한 일거리였던 그녀는 이제 홀로 인생의 원점으로 돌아와 자립 또는 재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녀의 자립은 순조롭지 않다. 디자인 강의를 듣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고,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 동네 치과의원에서 일을 하는 기이한 상황이 펼쳐진다. 의원에서의 일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의사는 자꾸 개수작을 부리는 바람에 그녀는 결국 일을 그만둔다.


동생의 시끄러운 아파트, 한심한 주변 인물들도 재스민에게는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좁고 허름한 발판에 불과하다. 그녀는 모욕적인 현실 앞에서 고상했던 안주인 시절의 몸짓으로 꾸준히 주변과 거리를 둔다. 자존심이다. 나는 이 정도는 누려야 하고, 네가 그렇게 나를 대하면 안 되는 자존심.


돈을 잃으면 명예와 건강도 잃는 사회다. 세상에는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가치가 너무 많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건 마치 계단과 같아서 더 높은 계단에 익숙해지고 나면 돌아내려 가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빈털터리라면서 명품을 휘감은 채 일등석을 타고 온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의 평범하고 단출한 풍경 속에서 부조화를 일으킨다. 그녀가 정말 되찾고 싶은 건 뭐였을까.


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는 번듯한 남자가 나타나자 다시 트로피 와이프의 허울을 쓰려고 한다. 직업과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고,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로 바쁜 척하며 그의 앞에서 심리적 여유를 가장한다. 초조하게 그의 연락을 기다리던 그녀는, 기다리던 전화를 받고 난 뒤 감정에 북받쳐 혼자 오열하고 만다. 궁지에 몰려있는 그녀의 심정이 잘 드러났던 장면이다.


그녀가 정말로 여유로웠던, 하지만 명예롭지는 않았던 과거는 그녀가 혼잣말을 하거나 남들과 대화할 때마다 조금씩 관객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마치 비둘기한테 먹이를 던져주듯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튀어나와서 그게 또 재밌다. 잠시 거짓말로 멀어지고 있었던 그녀의 과거를 폭로하는 것 역시 갑자기 등장한 동생의 전남편에 의해서다. "어떤 사람들에게 과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야속한 일갈과 함께. 실은 재스민 역시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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