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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Jan 23. 2016

여행의 끝과 시작

비포 선라이즈 (1995)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어쩌면 가장 마지막 날 집으로 떠나는 그 순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는 택시 안, 유난히 길고 또렷하게 느껴지는 1분 1초 속에서 '아직까지는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침묵 속에 되새겼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으로나마 바쁘게 눈을 굴려 담아보는, 차창 밖 도시의 겉모습이 어쩐지 낯설고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런 순간에 느닷없이 누군가가 나타나 제동을 건다면 어떨까. <비포 선라이즈> 속 특별한 운명은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목에 있다.


늦은 오후의 유럽 어딘가. 국적이 다른 젊은 두 남녀는 각자의 집으로 향하던 한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고, 금세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내릴 역이 다가오자 남자는 여자에게 다음날 아침 자신이 공항에 가기 전까지만 함께 하루를 보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그 장소는 오스트리아 빈이다.


굳이 빈이 아니라 그 어떤 생소한 도시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에서처럼 영화가 비추는 도시의 면모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일상적 풍경에 가까워서인가 보다.







그들은 역에서 내려 행인들에게 빈의 명소를 묻지만, 어차피 저녁이라 볼만한 곳들은 다 닫았고, 둘은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데 여념이 없으니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엔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여자가 남자를 따라 무작정 열차에서 내린 결정적 이유는 처음 만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스스럼없이 내보이는 그 속내에 끌렸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할수록 대화는 솔직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은 새로운 인연을 사귀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곤 한다.


그들은 걷고 또 걸으며 낯선 도시에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사실 그들의 대화는 그날 이전의 삶 속에서 건져낸 생각,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작은 기대를 공유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열렬하다. 애석하게도 그리 자주 있는 기회는 아니지만, 이렇게 내가 인생에서 발견했던 것들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공유할 수 있는 대화는 늘 마음을 녹인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대본은 대체 어떻게 다 외운 걸까', '이게 대본이라니'와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극 중 몇 마디는 꼭 내 마음을 대신 읽은 것 같아 정곡을 찌르며 뇌리에 파고들기도 한다. 내가 배우고 믿는 것들을 통해 성공하고 싶고, 남자에게 기대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은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랑받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여자의 이야기가 특히나 나에게는 마음에 남았다.







비포 시리즈의 첫 영화로서, <비포 선라이즈>는 하루가 늘어난 여행의 마지막 길에서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의 설렘 가득한 대화록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아직 보지 않은 속편들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멎는 순간,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새로움, 우연, 즉흥과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열정과 짜릿함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편안하고 익숙해진 사이에서만 가능했던, 눈빛으로 더욱 많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그런 느슨하지만 따뜻한 순간들이 그립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백 마디 말이어도 시선을 맞추지 않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랑은 말보다 눈 속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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