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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moon society Aug 17. 2016

이문동 시간 여행

그들의 농도 : 사라질망정 흐려지지 않을

'지속하는 것들이 그 지역의 역사가 되고 집단기억으로 남아 궁극적으로는 공유되는 문화가 될 때 가치 있는 일들로 평가될 것이다.' 故 정기용 선생이 책에 남긴 말이다. 그는 공간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와 소통을 넘어 서로에게 교감하고 스며드는 '감응의 건축'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화려하고 깔끔한 디자인의 공간들이 줄줄이 생겨나면서, 꾸준히 한 곳에서 지속되어오던 공간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으며, 남아있는 이런 공간들을 찾기도 힘들다. 물론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온 가게는 많으나, 대부분 공간을 현대식으로 탈바꿈 시키면서 예전의 공간에서 느낄 수 있었던 향수는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 이문동에 오랫동안 기존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켜온 두 장소가 있다. 바로 신고서점길 다방이다. 30년 이상 지속된 이 두 장소에는 이문동의 시간이 녹아들어있다. 이문동과 역사를 같이 한 이 두 공간은 세대를 거듭한 이문동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가 담겨있으며 지금은 찾기 힘든 그 시절의 향수 또한 담겨 있다.


옛 것, 그리고 낭만에 대하여


옛 것들이 점저 사라지는 시대이다. 어릴 적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갔던 청계천 헌책방은 카페로 바뀌어 있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다방은 이젠 보기 힘든 곳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 앞에서 과거의 추억들은 머릿속 한켠에 자리잡은 채 어린 시절의 낭만으로 기억되고 있다. 할아버지의 포근한 손, 트로트가 울리는 다방. 가끔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옛 공간의 포근함에 젖어 잠시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보기 힘들다는 생각에 서글픔을 느끼곤 했다. 그러한 기억을 잊고 지내다 만난 '길 다방은' 옛 추억의 정취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이문동의 유일한 다방 : 길 다방



'길 다방'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문에서 출발했을 때 도보 7분, 거리 400m 정도에 위치해 있으며, 외대앞역 철길을 지나 걷다보면 오른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철길을 기준으로 이곳은 외대 앞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대 앞은 학생들이 위주인 젊은 감각과 신세대적인 분위기라면 이곳은 이문동 주민들의 오랜 삶의 터전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외대 앞과 달리, 이곳에서는 나이 지긋하신 어른신 분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즉, 이곳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해 온 외대 앞의 풍경과는 다른 이문동만의 시간이 잘 녹아들어있다.



작은 간판을 따라 건물 뒤쪽으로 걸어가면 길 다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인다. 길 다방은 작은 계단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길 다방의 내부 모습이다. 이곳에는 현대 카페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오래된 냉장고와 전화기, 디자인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 놓여있는 화분과 물건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의자들, 요즘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옛날식 달력까지... 이 모든 것은 이고ㅅ이 굳이 오래된 곳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 오래된 시간의 흔적들은 마치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길 다방의 메뉴들이다. 메뉴들 역시 예스러움이 잘 묻어 있다. 율무, 대추차, 한방차, 쌍화차 등은 현대 카페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메뉴들이다. 우리가 시킨 쌍화차의 진함만큼 길 다방의 세월의 농도는 굉장히 짙었다.


길 다방 사장님은 현재 64세로 이 '길 다방'을 운영하신 지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엔 여기뿐만 아니라 이문동에 다방들이 많았지만 현재 사장님만 유일하게 다방을 지켜오고 계신다. 사장님은 이렇게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오랫동안 가게를 찾아주시는 손님들 덕분이라고 하셨다. 동네 분들도 많이 와주시고 예전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오랜만에 찾아와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고 하셨다.


"여기는 사랑방이야, 사랑방. 사람들 만나는 장소로도 의미가 있지만 포근하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지. 옛날 추억이 많이 되살아난다고. 지금은 다방을 안다니는데 옛날 생각이 나 여기 들어왔다는 손님들도 계셔. 이곳에서 솔직히 돈을 많이 벌진 못했지만 사람을 얻은 거 같아."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길 다방은 단순히 가게가 아닌 동네 사람들의 수다 장소가 되고, 가끔 오시는 손님들은 추억을 되새기며 그 오랜 인연을 끊지 않고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포근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사장님뿐만 아니라 손님들에게도 그러한 장소일 것이다.


"나중에 쌍화차가 기억나면 또 와요. 여기는 연중무휴이고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문 여니까. 그리고 혹시 오래된 곳을 찾는 거라면, 이 철길 반대편에 신고 서점을 가 봐요. 그 서점이 아마 우리보다 오래되었을 거예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 : 신고서점



신고서점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정문에서 석관동 방향으로 300m 정도 걸어가면 바로 왼편에 있다.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주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문을 여는 이곳은 1985년부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어머니가 32년째 한 자리를 지키며 이문동 주민들과 학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겐 약속 장소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옛 추억을 떠올리고자 되돌아오는 곳. 다방과는 또 다른 추억과 낭만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신고서점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건 친절한 종업원도 아니요 베스트셀러도 아니다. 바로 책 냄새이다. 책들은 그간의 세월을 얘기하듯 진한 냄새를 풍기며 또 다른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 냄새에 이끌려 좀 더 들어가면 좁은 통로부터 무질서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들, 지금은 보기 힘든 수많은 LP 앨범들,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원형 계단까지 지금의 서점과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정교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러한 모습 자체에서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느껴지는 냄새는 책 냄새라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이 남기고 간 향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을 사러 왔다는 목적도 잊어버린 채 신고서점의 정취에 취하는 것이 이곳의 매력이다. 오래된 사전들, LP 앨범들. 사장님 개인이 모은 것도 있지만, 손님들이 헌 책과 내놓은 추억의 물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곳은 헌책방이면서 동시에 옛 물건들과 책들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종명 사장님은 이곳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히 오시는 단골손님들 덕분이라고 하셨다. 사장님은 그 중에서도 한 손님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기억에 남는 손님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쭉 꾸준히 오셨던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청년 시절 때부터 오셨던 목사님이 있었어요. 저희 아버지 때부터 말이죠. 처음에 혼자 오시던 그 분이 결혼을 하셔서 부인하고 같이 오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딸을 또 여럿 낳으셔서 딸들 손잡고 오시더라고요. 근데 그 딸도 어느새 대학생이 돼서 오고. 이런걸 보면 이 공간은 이젠 저희만의 공간이 아니라 단골손님들과 함께하는 공간이기도 한 것 같아요."



단골손님을 얘기하시며 웃으시는 사장님의 미소로부터 이제 이곳은 단순히 책을 사고팔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손님들과 함께 세월을 보내는 소중한 공간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개발로 이주 위기에 처한 두 노포


오랫동안 이문동의 이야기를 담아왔던 신고서점과 길 다방은 어쩌면 그 이야기에 곧 마침표를 찍어야 할지도 모른다.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곳이 없어진다 해도 책을 구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런 공간이 점점 사라진다면 그 시절의 정취와 향수를 우린 이제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두 사장님과 이야기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던건 두 분 다 단골손님들을 먼저 걱정했다는 것이다.


이제 갈수록 볼 수 있는 하늘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이문동은 하늘이 안 보이는 경우가 없었는데 지금은 고층건물들이 생기면서 여기서부터 턱 막히더라고. 조그맣게 개인적으로 하던 주변 노포들도 다 없어졌어요. 이제 저희도 재개발이 되면 없어지겠죠. 여기 오시던 손님들이 얼마나 아쉬워할까요?

- 신고서점 사장님 -


시대가 변하면서 다방이 점점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주변 다방들도 많이 없어졌죠. 유일하게 남은 저희 다방도 재개발이 되면 없어지겠죠. 신세대만을 찾는 이러한 변화가 참 아쉬워요. 다방 문화도 우리의 오랜 문화인데 다방을 다 없애면 문화가 없어지는건데... 그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요?

- 길 다방 사장님 -


새것을 찾는 변화의 바람 속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것들이 만들어낸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공간의 포근함과 따뜻함을 줄 수 있다는 걸 다음 세대는 공감할 수 있을까? 가끔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대형서점을 찾기보다 쌍화차 한 잔을 마시고 헌책방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서 옛 기억을 찾길 기대한다. 예전에 사라졌지만 흐려지지 않을 그런 기억들을..



ⓒ 이혜민 구성철 손영민 황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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