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부터의 편지 (1)

NIRVANA SAGA

by 이상민 NIRVANA

재회


정말 지독히도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에서도, 최근 몇 년간 그랬듯이 이번 장마에도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하더니 정말로 그랬다. 이 지겨운 폭우의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더운 것도 싫고 딱히 맑은 날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여름답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그리웠다. 막연히 그립다, 라는 느낌보다는 지루한 기다림이랄까. 정말이지 기다리는 일엔 이제는 이골이 났다. 너무 지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처럼 비가 내릴 때마다 생각나는 두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마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리라.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에서 8분 정도가 모자란다.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은 오후 2시, 아마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라면 곧 나타날 것이다. 1분 1초의 오차도 없이. 그러나 지금은 3분도 매우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물었다. 벌써 다섯 개비 째다. 보통 사무실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오늘은 예외다.

후우, 담배 맛이 썼다.

기분 탓이겠지.

반쯤 남은 담배를 창가에 놓아둔 종이컵에 버렸다. 언제나 금연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필터 끝부분까지 피운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금연에 성공한 적 또한 한 번도 없었다. 벌써 몇 년 째, 담배를 끊어보려고 했지만, 지금처럼 비오는 날이면 습관처럼 입에 물게 된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오래전 기억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무의식중에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또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아니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시가 온통 물에 잠길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희박하겠지.

도대체 얼마나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까맣게 몰려온 먹구름으로 어두워진 하늘을 향해 의미 없는 원망을 해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모두 삼키고 싶은 거냐."

나는 심드렁하게 내뱉으며 차츰 침수되어 가는 마천루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모두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상에서 강림한 수마(水魔)는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체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길 기세지만, 내겐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은 아니니까. 당장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늘 그래왔다.

20년 전, 그날 이후로는…….

그리고 20년 전, 그날과는 많은 것이 변해버린 나.

시장에서 산 싸구려 등산복 대신에 지금은 수백 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아르마니 정장을 걸쳤고, 군인처럼 짧았던 머리칼도 지금은 좀 더 길게 자라서 정돈된 느낌이다.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던 대학생이 지금은 잘 나가는 광고회사의 사장이 되어 적당히 거드름도 피우는 속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아니 그것은 절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1시 59분.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1분 후면 ‘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나는 이제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담배를 종이컵에 버리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돌아섰다. 꽁초로 채워진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고, 마지막으로 넥타이까지 고쳐 멨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사장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손님? 누구죠?”

“네, 이름은 말씀안하시고 그냥 운사라고 하던데요? 좀 특이한 분 같던데…….”

드디어 그가 왔다.

“아, 그래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그리고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일정은 내일로 미뤄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비서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듯 습관적인 멘트를 했다. 3년간 같이 일을 했지만 정말 유능한 여자다.

비서가 나간 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습관처럼 시계로 눈을 돌렸다. 정확히 2시. 1분 1초도 모자라지 않았다.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간편해 보이는 캐주얼 복장을 한 그가 들어왔다. 나는 가슴이 떨렸다.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20년 전…… 꼭 20년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많은 비가 내렸었다. 지독한 폭우…… 그날 이후로는 비를 볼 때마다 아련한 기억의 상처가 되살아났다.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악몽을 꾼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의 일은 분명 내게 일어났었다.

악몽 같은 현실.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그’는 내가 겪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지난번에 가게에서 만났을 때는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오랜 만이군요, 박성일 씨. 벌써 20년이나 흘렀군요.”

그가 악수를 청한다. 그때와는 다르게 우호적인 태도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다시 과거의 기억과 조우한다.

“20년…… 그렇군요. 벌써 20년이죠."

“네, 그동안 많이 변하셨네요?”

“20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그대로군요.”

이 남자, 이름도 모른다. 그저 '운사'라고 불린다는 것밖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로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정말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요. 하나도……."

이 남자에겐 세월의 흐름조차 무의미한 것일까? 놀랍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20년 전 그날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20년 전 그날처럼……. 1




폭우 속에서


“이런, 젠장! 정말 지독하게 퍼붓네. 날 한번 아주 끝내주게 잡았다."

그랬다.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커다란 나무가 휠 정도로 바람의 기세도 거셌다. 제기랄! 원망스런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봐도 달라지는 일은 없다. 일기예보에서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했었지만, 변화무쌍한 산의 날씨를 감안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내릴지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다. 이런 빗속에서 산행을 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더욱이 산속은 도시에서보다 밤이 빨리 찾아온다. 그러니 대책 없이 마냥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정말로 난감하다.

그리고 난 지금 혼자가 아니다.

“오빠, 어두워지려나 봐요. 어쩌죠?"

현지가 내 팔목을 단단히 잡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목소리도 떨렸고,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런 악천후 속에서 나 자신 뿐만 아니라 현지의 안전까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걱정 마, 플래시 있잖아.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았지?"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다. 내가 안고 있는 부담을 현지에게까지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도 충분히 두려워하고 있는데……

“내 별명이 뭐냐? 벌써 잊었어?”

“산……산귀신이요.”

자랑은 아니지만 난 타고난 산사람이다. 유난히 산행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영향도 있겠지만, 등산동아리도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어가고, 군대생활도 산악전 특수부대에서 근무했다. 평지보다 산에서 걷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행에는 자신이 있었고, 덕분에 생긴 별명이 ‘산귀신’이다.

“그래, 내가 산귀신이야. 내가 군대 있을 땐 이보다 더 심한 날씨에도 산을 몇 개나 타고 다녔어. 이거? 껌이야. 나만 믿어? 알았지?”

전혀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당시엔 산행에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지금은 거의 맨손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내색은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소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현지에게 다짐을 받았다.

“그러니까 나만 믿어. 오케이?”

“네."

현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게 있어 현지의 미소는 그 누구의 응원보다 힘이 된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이런 악천후쯤은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좋아. 그럼 계속 가볼까?"

나는 현지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힘차게 내딛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처음엔 의욕이 앞선 탓에 보폭을 크게 넓혔다가 그 속도가 현지에게는 벅차게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얼마 못가서 보폭을 줄여야했다. 비는 앞으로도 계속 내릴 것이 분명하고 갈 길은 멀었다. 그런데 이동속도까지 떨어지니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현지를 등에 뛰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평지도 아닌 산중에서 누군가를 업고 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길도 엉망이다. 장시간 동안 내린 비로 인해 진창이 되어버린 산길을 걷는 일이란 여간 곤혹스런 것이 아니었다. 산행에 익숙한 나도 자꾸만 미끄러지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으니, 현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해가 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날씨도 문제지만 어둠은 정말 큰 난관이다. 그리고 현지가 걱정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도봉산으로 소풍을 간 이후로는 산행이 처음이라고 했는데 이런 고생을 시키다니…… 현지를 데려온 내가 잘못이다.

제기랄! 이런 날씨에 MT를 강행한 동아리 회장이란 녀석은 도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다. 욕설을 내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산장을 찾아야 할 텐데……."

빌어먹을! 남자인 나도 힘든데…… 현지는 내 옆에 바짝 붙어 넘어질세라 아주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었다. 현지와 보조를 맞추며 걸음을 옮기던 나는 랜턴으로 시계를 비췄다. 어느새 9시가 넘은 시각. 벌써 몇 시간째 산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간 앞서 출발한 선발팀과 합류하기로 약속한 산장은커녕, 이대로 산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녀석들은 도착을 했을까? 망할 놈의 회장. 약속한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보내 마중이라도 나와야 될 것 아닌가. 이런 악천후라면 무슨 문제가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거잖아. 그리고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회장이 가만히 있으면 자기들이라도 찾아 나서야 하는 거 아냐? 평소에도 예비역이라도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더니, 이제는 아주 대놓고 사람을…… 나쁜 녀석들! 어디 두고 보자. 선배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때를 보여주겠어! 젠장! 젠장!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시 시계를 보았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현지가 아르바이트를 늦게 마쳐서 마냥 기다리다간 버스를 놓칠 것 같아 회장과 동아리 후배들을 먼저 보내고 내가 남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떠나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 현지가 도착했고 우리는 예정보다 2시간이 늦게 출발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지를 원망하진 않는다. 애초에 현지는 산행에는 관심이 없던 아이였다. 이번 MT도 내가 억지를 부려서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내가 고집만 피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원인제공을 내가 한 셈이다.

내 팔을 잡고 있는 현지의 손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비를 맞으면서 걸었기 때문에 체온이 떨어진 모양이다. 저러다가 감기라도 걸린다면, 난 정말…….

“현지야, 괜찮니?"

“괜찮아요. 오빠. 그나저나 정말 미안해요. 저 때문에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오빠까지 고생을 하네요.”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기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고생을 시키려고 고집을 피워가며 데려온 것은 아니었는데. 자꾸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보야, 미안하기는. 당연한 걸 가지고…… 미안한 걸 따지면 내가 더 미안하지. 널 억지로 데려온 사람은 나잖아. 내가 쓸데없이 고집만 피우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고생은 하지 않았을 거야. 나야말로 정말 미안해."

“오빠가 왜요. 사실 동아리에 가입만 해놓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한 번도 산행에 참여하지 않았잖아요. 다른 선배들이 저한테 불만이 많으면서도 오빠가 감싸주셔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는 거,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여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오늘따라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현지가 울먹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건 너도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난 게 너 때문이니? 아니지?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자꾸 그러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응? 현지야.”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숲을 벗어나는 게 급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겨우 5분 정도가 경과했지만 거의 5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오늘밤은 내 평생 가장 긴 밤으로 기억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산장에 도착했을까요?"

현지가 물었다.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글쎄, 그랬다면, 마중이라도 나왔을 텐데…… 걔네들도 우리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아무튼, 서둘러서 산장을 찾아가자."

아무리 껄끄러운 선후배 사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날씨에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막 되먹은 녀석들은 아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 어쩌면 다른 녀석들도 우리처럼 빗속에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후배들에 대한 원망이 걱정으로 바뀌었다.

“그 산장,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럼, 찾을 수 있을 거야"

막상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산장은커녕 비를 피할 만한 곳도 찾는 일조차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랜턴의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들리지 않는 실낱같은 비명을 남기며 랜턴이 그 생명을 다하면서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야말로 절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진짜 꼬이네!”

나는 신경질적으로 랜턴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로 그때다.

“오빠! 저기요, 저길 봐요!”

현지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응?"

나는 현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봐요, 불빛이 보이죠? 그렇죠?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니죠? 맞죠?”

정말이었다. 현지가 가리키는 곳에 불빛이 보였다. 거리상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순간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현지의 손을 잡고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렸다. 현지 역시 갑자기 기운을 얻은 사람처럼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열심히 달렸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우리는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질 않았다.

숨이 가쁘게 느껴질 정도로 전력질주를 한 우리는 불과 몇 분 만에 불빛이 흘러나오는 근원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드니, 우리의 눈앞에 통나무로 지은 2층짜리 낡은 목조건물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었다.

현지가 건물을 살펴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산장 같아요. 그렇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의 말처럼 낡은 산장이었다. 불빛은 이 산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는 찬찬히 산장을 훑어보았다. 출입구로 향하는 계단의 초입에 낡은 판자에 인두로 글자를 새긴 푯말이 보였다.

“하늘이 우리를 도왔는걸. 어라? 푯말에 뭐라고 써 있는데? 산장 이름인가."

“영… 산장? 글자가 지워져서 못 알아보겠네. 맞다! 오빠, 우리가 만나기로 한 산장 이름이 영흥 산장이었죠?"

“응, 맞아."

“그럼, 여기가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그 산장인가 봐요. 맞죠? 근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혹시 여기 말고 다른 산장이 또 있는 걸까요? 그럼 여기가 아닌가."

“됐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잖아. 어서 들어가자. 여기가 맞든 안 맞든 일단 비부터 피하고 봐야겠어. 이러다간 둘 다 감기에 걸릴 거야. 얼른.."

나는 망설이는 현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잠시 문 앞에 멈춰 섰다가 급한 마음에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아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현지의 손을 꼭 붙잡고 앞장서서 걸었다.

“어라, 문이 열려 있는데…….”

산장 안은 밖에서 본 것과는 달리 의외로 넓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동아리 후배들은커녕 산장지기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래 전에 버려진 산장인지도 몰랐다.

“계십니까? 아무도 없나요? 여보세요?”

“오빠,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아무도 없나 봐요."

“그러게. 버려진 산장인가? 그 겁 많은 동수가 이런 으슥한 곳을 MT장소로 정할 리가 없는데…… 뭐,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지. 비를 피한 것도 어딘데. 안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며 현지와 함께 산장 여기저기를 살피며 돌아다녔다. 일가족이 산장을 운영했는지 1층에는 살림살이가 많이 보였고, 빨래를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세탁물도 있었다. 냉장고도 있었는데 전원이 끊겨 있는 까닭에 보관되어 있는 음식물은 모두 부패된 상태였다. 꽤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았는지 카운터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금고 아래에 비치된 열쇠함의 객실열쇠들도 녹이 슬어있었다. 열쇠의 숫자로 보아 객실은 모두 10개인 것 같았다.

나는 현지의 손을 이끌고 카운터 오른편으로 나있는 비접은 복도로 들어갔다.

“근데 오빠, 여기 조금 춥지 않아요?”

현지가 가볍게 감싸며 말했다. 실제로 실내온도가 매우 낮아서 현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걸치게 했다.

“자, 감기 걸리겠다. 얼른 이걸로."

“고마워요. 오빠."

현지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한다.

“고맙긴. 당연한 걸 가지고."

왠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요. 정말, 고마워요."

현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복도의 끝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밖에서 봤던 그 불빛이었다.

“어? 불빛이 저쪽에서 나오는데? 가보자."

낡은 판자를 댄 비좁은 복도를 지나니까 조금 넓은 거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중앙에는 두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작은 소파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40인치 정도 되는 대형 TV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었는데, 불빛은 바로 벽난로에서 나온 것이었다. 누군가 불을 지폈는지,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 이런 곳에 벽난로가 다 있네. 저리로 가서 불을 쬐자."

“와, 정말이네요."

우리는 벽난로 앞으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고 피곤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현지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모포를 옆에 내려놓고 손을 뻗어 벽난로에서 나오는 열기에 몸을 맡겼다. 드디어, 현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내색은 안했지만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아, 따뜻하다.”

“그렇지?"

“이런 곳에 벽난로까지 있다니 다행이다. 그렇죠, 오빠?"

“그러게. 정말 다행이다. 실은 나도 조금 추웠거든. 원래 산속에선 여름밤이라고 해도 온도가 내려가거든.”

“아, 그렇구나. 그래도 이렇게 불을 쬘 수 있으니 정말, 정말 다행이요.”

아이처럼 좋아하는 현지의 얼굴을 보면서,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진 않았을 텐데. 나의 시선이 느꼈는지, 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그런데요, 오빠. 정말로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걸까요. 그럼, 누가 불을 피웠을까요?"

“음? 듣고 보니 그렀네? 진짜 불은 누가…….”"

순간, 푸른 섬광이 번쩍이면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현지가 비명을 지르며 몸이 움찔거렸다. 갑작스런 천둥소리에 놀란 모양이다.

“엄마…….”

나는 현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달래주었다.

“괜찮아. 그냥 천둥소리야."

다시 번개가 쳤다. 이번에는 천둥소리가 들리기에 앞서 현지의 비명소리가 산장 안에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오빠! 저……저기……."

현지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뒤쪽을 가리켰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귓가에 포성 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저기요. 저기!”

현지가 가리킨 곳은 2층의 객실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그곳까지는 불빛이 닿지 않아서 어두웠기 때문에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2층은 살펴보지 못했다.

“왜 그래? 뭘 봤는데 그래?"

내가 묻자, 현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대답을 했다.

“저기에 누가 있어요. 바로 저기에…….”

현지가 그렇게 말했지만 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에서 계단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누가 있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저기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분명히……."

현지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지가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 무서워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봬도 특공대 출신이잖아. 자자, 염려 말고.”

“조심해요, 오빠…….”

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푸른 섬광이 창을 통해 들어와 계단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글쎄 걱정하지…… 헉!"

정말이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현지의 말대로 누군가 계단에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푸른 섬광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었다.

손에서 식은땀이 베어 나왔다.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계단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차츰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점점 더 뚜렷하게 보였다. 만일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등산용 칼을 찾았다. 다행히, 칼이 손에 잡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둠 속에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 누……누구요! 누군지 어서 말을 해요."

현지를 나를 잡아당겼다.

“오……오빠."

“괜찮아. 이……이봐요! 거기.. 누...누군지..어서.. 말을 해..해...애요.."

애써 침착 하려고 했지만,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걸어 나왔다.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무섭게 고동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는 그가 무척 두려웠다. 나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고 묻잖아,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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