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RVANA SAGA
수수께끼의 남자
“누구야! 뭐하는 새끼야! 어서 말해!”
악에 받친 나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러 퍼졌지만 상대는 전혀 눌리는 기색도 없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찌그덕, 찌그덕.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낡은 마룻바닥이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그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침묵에서 느껴지는 위협감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등에 벽이 닿아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옆에선 현지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나와 현지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며 아주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노려보며 주머니 속의 등산용 칼의 날을 조심스럽게 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여차하면 주머니에 넣어둔 등산용 칼을 꺼내자마자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등산용 칼의 날이 완전하게 펴졌을 때, 무슨 신호처럼 귓전을 때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시퍼런 전광이 산장 안을 휩쓸고 지나갔고, 나는 비로소 우리에게 위협을 주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그’는 남자였다.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에 짙은 눈썹,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언뜻 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갓 20살이 된 나이로도 보이고, 30대나 10대 소년으로도 보이는 매우 특이한 분위기였다. 복장도 주머니가 많이 달린 군복스타일의 카키색 바지와 검정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빗속에서 헤맸는지 겉에 걸치고 있는 짙은 감청색의 우의에서는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꺼져!"
나와 현지를 찬찬히 뜯어보던 그가 돌연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내뱉었다. 인정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기대하기 힘든 목소리다. 내가 무언가 대꾸를 하려는 순간 또 다시 시퍼런 섬광이 들이치면서 그의 얼굴에 기이한 푸른 음영을 남겼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가 위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칼을 움켜쥐다가 실수로 날을 잡았는지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피가 나는 것 같다. 기분 탓인지 진한 피 냄새마저 느껴졌다.
“뭐라고요?"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그에게 항의했다. 좀 더 강하게 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기에 눌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현지도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움츠리며 내게 바짝 붙어 섰다.
“내 말을 못 들었나?”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서릿발 같은 싸늘한 시선으로 우릴 노려보았다. 마치 내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다.
그의 모습이 무서웠는지 현지가 내 팔목을 세게 잡았다.
“오빠……."
현지의 가녀린 목소리가 내게 힘을 불어넣었다. 나는 그에게 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금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죠?”
피식, 그가 조소를 머금었다.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나는 여기서 꺼지라고 말했어. 이젠 제대로 들었나?”
“뭐……뭐라고?”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그에게 되물었다. 그에게서 우호적인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의 말이었다. 이런 빗속에서 우리를 보고 나가라고 하다니, 난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자 어느새 그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현지를 의식한 나머지 괜한 호기를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봐, 당신! 지금 말 다했어? 꺼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우리보고 이런 날씨에 밖으로 나가라는 건가? 그래? 당신이 뭔데 우리보고 나가라 마라 하는 거야! 어!”
짐짓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한다는 것이 바보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후후.”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발끈하고 뭔가 행동을 취했겠지만 놀랍게도 나는 그의 태도를 수긍하고 있었다.
“정말 바보로군.”
그가 웃음기를 지우며 나와 현지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머니 속의 칼을 움켜쥐며 언제든 빼어들 준비를 했다. 칼에 벤 상처가 여전히 따끔거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위해 말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실소했다.
“무슨 헛소리야. 우릴 위해서 말을 했다니…… 지금 날 바보로 생각하는 거야? 밖에선 저렇게 퍼붓고 있는데 우리보고 나가라면서? 그게 우릴 위한 말이라고? 당신,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지지 않고 반문했다.
그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고는, 이번에는 다소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내가 한 말은 사실이야. 정말로 당신들을 위해서 한 말이라고. 여기보다는 차라리 비가 쏟아지는 밖이 당신들에게 더 이로운 공간이야. 알겠어? 농담이 아니라고. 여긴 말이야, 지옥보다 더한 곳이야. 지옥보다도 말이야."
“뭐? 나 참 진짜 어이가 없어서…… 밖에서 비를 맞는 게 우리한테 더 이롭다고? 이 새끼가 정말…… 야!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어?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래 너 미쳤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새끼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 안 그래!”
너무도 어이없는 궤변에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너무 흥분하지 마. 화기(火氣)가 지나치게 승(昇)하면 몸을 상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는데 한시라도 빨리 여길 나가는 것이 여러 모로 좋아.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불편해진 내 심기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응수했다.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럼 우리가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음장처럼 차디찬 시선이 내게 꽂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고 나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현지가 덩달아 뒷걸음을 치며 내 팔을 끌어안았다.
“후훗,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기어이 고집을 부린다면…… 하기야 놈들에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후후후.”
나는 그의 웃음소릴 듣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다리가 꺾이며 주저앉으려는 것을 가까스로 버텼다. 내 팔을 잡고 있는 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현지의 얼굴을 보았다. 현지가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살기어린 시선이 현지에게 머무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그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현지를 등 뒤에 세웠다.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그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불쾌감을 느껴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만약, 현지에게 손을 댄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다. 충분히 그런 각오가 되어 있다.
“좋아, 마음대로 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후회하게 될 거야.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인간이 있을 곳이 못돼. 이 산장에는 아주 악질적인 마물(魔物)이 살고 있거든. 단순한 지박령 따위가 아니야. 말했지? 여기는 지옥보다 더 지독한 곳이라고. 굳이 설명을 하자면 여기는 인간의 각종 탐욕과 원념으로 오염된 곳이야. 그리고 유계(幽界)와 이어지는 입구이기도 하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어. 알아봐야 별로 득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알겠어? 나는 이 산장을 정화하기 위해 온 사람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정말로 당신들을 위해서라고. 그래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지만 말이야. 알아서들 해. 여길 나가서 목숨을 구하든지, 아니면 그냥 있다가 마물의 희생양이 되든지. 선택은 자유야. 단 선택에 의한 결과도 당신들 몫이지.”
미친 소리였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화까지 났다. 난데없이 마물이며 지박령이라니, 이건 정말이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나는 그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최근에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는 퇴마록이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PC통신에 연재되었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종이책으로까지 출간된 소설로 퇴마사라는 존재들이 귀신이라든가 흡혈귀 같은 온갖 마물들을 퇴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소설의 내용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과대망상자인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 그럴 것이다. 나는 미친놈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뭐야? 이제 보니 이거 아주 또라이 아니야? 뭐? 지박령? 마물? 그리고 뭐? 여길 정화하러 왔다고? 너 퇴마록을 너무 열심히 읽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설과 현실도 구분을 못하냐?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나 이거 정말 어이가 없어서…… 야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너나 꺼져라…….”
나는 지금까지 참았던 동아리 후배들에 대한 울분까지 모두 토해내며 있는 대로 폭언을 퍼부었다.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가 아는 모든 욕들을 동원했고 벌겋게 핏대를 세워가며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온갖 악의를 쏟아 부었다. 그것은 마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아, 하아… 너야말로 이제 내 말을 알아들었냐? 이 미친 새끼야!”
한꺼번에 많은 말들을 쏟아낸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이곳은 심각할 정도로 오염되었군. 어때? 당신도 느꼈겠지? 미처 깨닫지 못한 분노와 악의를 일시에 터뜨리고 싶은 유혹을 받았잖아. 안 그래?”
“개수작 그만 떨라고 했지!”
나는 기어이 주머니에서 등산용 칼을 꺼내 그에게 달려들었다. 현지가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현지의 비명소리에 아차! 싶어서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칼을 내리친 후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칼을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그는 이미 멀찌감치 피해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조금은 분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적개심, 분노, 살의…… 인간의 마음속 밑바닥에 깔려 있는 어두운 감정들, 바로 유계의 쓰레기들인 나찰들이 가장 좋아하는 양식이지. 당신이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그냥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군.”
그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좋아, 정 원한다면 그냥 여기에 있으라고. 그게 당신의 선택이라면 그 결과까지도 당신의 몫이라는 것만 기억해. 그래,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녀석들을 끌어들일 미끼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
“미끼? 이봐,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봐, 잠깐만!”
그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벽난로 옆에 나있는 작은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황급히 그를 뒤쫓아서 나가봤지만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희미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명심해. 난 경고했어. 후회했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릴지도 몰라.
끝까지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현지가 부르는 소리에 침을 탁 뱉고 다시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 사람…… 갔어요?”
“응. 가버렸네. 신경 쓰지 마. 정신 나간 놈 같던데 뭘. 지가 무슨 퇴마록에 나오는 현암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미친 새끼. 자자, 그런 녀석은 빨리 잊어 버려. 어라? 불길이 약해졌네. 가만 있어보자. 장작이 더 필요하겠는걸."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산장 전체가 나무로 된 것을 생각해내고 낡은 마룻바닥을 뜯어서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현지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해도…….”
주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멋대로 훼손해서 걱정이 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현지부터 안심시키고 볼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여기 주인도 없이 버려진 산장 같던데…… 이 까짓 마룻바닥을 좀 뜯어냈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그나저나 너 배고프지 않니? 난 좀 고픈데.”
현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배고파 돌아가실 것 같았다. 몇 시간을 빗속에서 헤매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체력에 자신하던 나도 이 지경인데 현지는 오죽할까. 우리는 배낭을 열어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모두 꺼내 놨다.
“으음. 생각보다 진수성찬이 되겠는걸. 이 정도면 내일 아침까지 끄떡없겠어.”
“후훗, 네. 그럼 먹어볼까요?”
“어어!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할라.”
“오빠두요. 꼭 며칠 굶은 사람 같아요.”
“뭐? 그러는 넌 어떻고! 하하하하”
“후훗. 그런가요?”
우리는 배가 고파있던 탓에 배낭에서 꺼낸 음식물들을 그야말로 개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현지도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자 동작이 빨라졌다. 그렇게 허기가 가시고 포만감이 느껴지자, 너무도 당연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따뜻하니까, 졸려요.”
“으으응, 나도 그러네. 아아암.”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기대었다. 벽난로에서 전해지는 온기 탓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산장은 목조로 되어 있어 다행히 땔감은 많았다. 아침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지야? 현지…… 음? 잠들었구나. 자식,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더니 정말 피곤했나 보네.”
현지가 먼저 쌔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피할 수 없는 수마(睡魔)의 유혹에 몸을 맡겼다. 창문을 때리는 천둥소리도 이제 자장가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포근한 자장가, 어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로…….
산장주인
“이봐요, 학생! 일어나라고, 내 말 안 들려? 학생! 그만 좀 일어나라니까."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가 날 깨우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조용히 일어났다가 여러 사람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누구라니? 이 친구가…… 이 사람아, 그거 내가 물어볼 말이지.”
대략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의를 반으로 접어서 오른팔에 걸치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금속제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등산용도 아니고 표면에 전체적으로 검붉은 기운이 감도는 기분 나쁜 지팡이였는데 그 용도가 궁금했다.
“저기 그러니까 저는…….”
갑자기 환한 빛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끊겼던 전기가 들어오면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이 켜진 것이다. 나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고, 이제야 살 것 같네. 번개 때문에 두꺼비집이 내려갔나 봐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중년 여자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마흔 정도 되었을까? 남자와 마찬가지로 카키색 우의를 걸친 여자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와 함께 나란히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나 우의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나, 총각도 일어났네?”
여자가 새빨간 루즈를 바른 입술로 히죽 웃으며 내게 바짝 다가섰다.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여자의 돌발적인 행동도 그렇지만, 180센티미터인 나와 눈높이가 비슷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여자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킥킥거리며 말했다.
“아이구, 누가 잡아먹어? 놀라기는…….”
“이 여편네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짐이나 풀어.”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알았어요,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셔.”
여자는 투덜거리면서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정말 누구시죠?”
내가 물었다.
“허허, 이 친구가 정말. 이 사람아, 누구긴 누구야. 집주인이지.”
“아? 그러면 여기 산장지기신가요? 전 주인이 없는 곳인 줄 알고…….”
“아저씬 누구야? 왜 우리 집에 있어?"
사내아이가 품에서 커다란 막대사탕을 꺼내 쭉쭉 빨아대며 내게 질문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사내아이는 무시당한 것이 기분 나빴는지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전 버려진 산장인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주인이 있으리라고는…….”
정황으로 보아 이 낯선 남자가 산장 주인인 것 같았다. 인상을 살펴보니 동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산장을 비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게 말이야, 여긴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워낙 외진 장소라서 뭐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 장사도 안 되고 해서 마누라랑 아들놈 데리고 잠시 시내에 있는 처가에 가 있다가 일기예보 듣고 산장이 무너질까봐 부랴부랴 올라왔지. 워낙 낡은 건물이라서 말이야. 그건 그렇고 학생은 누구지?”
아하! 그런 것이었군. 듣고 보니 대충 사정을 알 것 같았다. 이번엔 내가 사과를 할 차례였다. 나는 넙죽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산행을 왔다가 갑자기 폭우를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저는 주인이 없는 줄로만 알고 허락도 없이…… 정말 죄송합니다.”
“아,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퍼붓는데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다 돕고 사는 거잖아. 그리고 나야 숙박비만 내주면 다 오케이지. 우리 마누라가 알아서 아침까지 지어 줄 테니까. 흐흐흐. 웅? 근데 바닥이 왜 이리 부서졌남. 쥐가 갉아먹었나? 어이, 내일 아침에 쥐약 좀 놔. 바닥을 다 긁어먹었네."
“알았어요. 이상하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불을 때기 위해서 바닥을 뜯어 낸 건 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산장 주인은 마음이 좋아 보였다. 그의 가족들도.
“자, 따라 와요. 내가 방을 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현지…… 어? 얜 어디 갔어?"
그러고 보니, 현지가 안 보였다. 어디로 갔지? 바보처럼, 현지를 잊고 있었다니. 나도 정말 한심한 인간이다.
“현지? 아, 그 아가씨를 말하는 모양이군. 학생이랑 일행이지? 그 아가씨는 벌써 방에 먼저 가 있지"
“그래요?”
이상하군, 날 깨우지도 않고 혼자서 가다니. 주방에서 짐을 풀고 나온 여자가 사내아이의 우의를 벗기다말고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애인인가 봐요? 아가씨가 참하게 생겼던데, 호호"
“아, 네. 감사합니다.”
애인이라……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우쭐해져서 실실 웃다가 아직까지도 사탕을 빨고 있는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사탕을 빠느라 새빨개진 혀를 날름거리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교활한 미소를 짓더니 여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엄마, 걔는 내 꺼야. 처음부터 점찍어 뒀어. 잊지 마."
“응, 무슨 말이지?”
나는 아이에게 되물었다. 아이가 말하는 ‘걔’는 분명히 현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잘못 본 것일까. 장난스럽게 웃던 아이의 눈빛에 붉은 기운을 감도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고? 꼬마야, 방금 무슨 말을 한 거니?”
내가 다그치듯 묻자. 여자가 당황해하며 아이를 나무라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얘가 그냥 농담을…… 하하, 신경 쓰지 마세요. 아이들이란 원래 그렇잖아요. 그냥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 더욱 수상했다.
“네? 제가 분명히 들었거든요. 방금 얘가 말하기를…….”
“아, 뭐해! 빨리 정리하고 자야 할 거 아니야? 그냥 밤 샐 거야? 거 쓸데없이 입방정 찧지 말고 빨리 움직여.”
어느 틈에 램프를 들고 나온 산장주인이 여자에게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기 때문에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우리 애가 무슨 소리라도 했나?”
산장주인이 내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괜히 쓸데없는 일 가지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 뭔가 몹시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아, 아니요. 그냥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여전히 기분 나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 친구를 만나야지. 이쪽으로 와요.”
산장주인이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나도 산장주인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건물도 그렇고 워낙 낡은 계단이라 그런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산장주인이 한마디 한다.
“어이, 조심해. 계단이 낡아서 발이 빠질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네.”
“다 왔네, 이 방이야."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산장 주인이 노크를 했다.
“이봐, 아가씨.”
“누구세요?”
문 저편에서 들려온 것은 현지의 목소리였다.
“나여, 산장주인. 친구랑 같이 왔어. 문 좀 열어 봐.”
산장주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 문이 열리고, 현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날 반겼다.
“오빠, 왜 이리 늦게 올라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먼저 말도 없이 올라온 녀석이 누군데, 하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게다가 옆에는 산장주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푸념 아닌 푸념을 했다.
“야, 넌 의리 없이 혼자 오냐.”
“오빠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 먼저 올라왔던 거야. 오빠가 깨어나면 그때 불러달라고 부탁만 해놓고.”
“미안.”
현지가 살짝 눈웃음을 치며 내 손을 잡았기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산장주인이 그런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이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난 내려 갈 테니까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저기 문 앞에 달린 종을 치라고.”
산장주인이 방 입구에 걸려 있는 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죠.”
나는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산장주인이 내려간 것을 확인한 나는 현지의 손을 이끌고 방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음, 음. 현지 너!”
나는 금방 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현지를 노려봤다. 조금 전엔 산장주인이 보고 있어서 할 말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상을 쓰자, 현지가 애교를 떨며 내 팔을 안았다.
“오빠가 너무 곤히 자니까, 못 깨웠다고 했잖아. 그 정도도 이해 못해? 뭐야, 오빠 화났어? 화났구나. 났지, 났지, 났지?”
현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냐, 임마! 화 안 났어."
역시, 현지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내가 웃자 현지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방이 생각보다 꽤 넓네.”
주변을 돌아봤다. 낡은 산장치고는 방안이 의외로 깨끗했다. 나무로 만든 이층 침대도 있고 천장에 매달린 램프에서 나오는 그윽한 불빛이 제법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꼭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오빠,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여행 온 거 같다.”
내 생각은 읽은 것일까? 나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가? 그럼 말 나온 김에 정말 신혼부부처럼 지내볼까?
“오빠는 참…….”
내 말에 짓궂게 웃던 현지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더니 스르륵 눈을 감는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낸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왠지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기도 하고 긴장이 되었다. 분위기 탓이리라. 바보처럼 머뭇거리다가는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현지의 입술 위로 살며시 내 입술을 포개었다.
키스는 부드럽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루어 졌다.
너무 앞서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졸업을 하면 곧바로 현지와 결혼을 할 생각이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현지를 봤을 때 나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현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다행히 현지도 내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선후배 사이를 벗어났을 뿐, 확실한 쐐기를 박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번 엠티에 멋진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현지의 아르바이트는 평소보다 늦게 끝나고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었어도 이렇게 현지와 오붓하게 단둘이 있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프러포즈를 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 오히려 이런 산장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는데 좋잖아. 불빛도 아늑하고, 밖에선 빗소리도 들리고…….’
이렇게 분위기 있는 장소를 보고 무슨 마물이니, 요염 되었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불현듯 산장에 들어왔을 때 맞닥뜨렸던 그 과대망상 환자가 생각났다. 뭐라고 그랬더라? 그렇지. 여길 정화하러 왔다고 했었지. 자기가 무슨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고…… 정말 인생이 불쌍하다.
“하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어이가 없네.”
갑자기 그 정시나간 사이코를 떠올렸더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뭐가?”
“응? 아아, 아까 만났던 그 사이코 말이야.”
“사이코? 누구?”
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벌써, 잊어버린 걸까? 그래봤자,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인데.
“기억 안나?”
“무슨 소리야,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현지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정색을 하는 것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코를 먼저 발견한 것은 내가 아니라 현지다. 그런데 어째서 기억을 못하는 것일까.
“정말 몰라? 왜 아까, 벽난로의 불을 피워 놓은 그 사이코 있잖아.”
“누가 왔었어?"
정말, 이상했다. 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지는 오히려 얼굴색을 바꾸며 내게 따지듯 물었다.
“자세히 좀 말해봐. 누구를 말하는 거야? 사이코라니, 그게 누구야?”
순간, 현지가 내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2년 동안 현지는 내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했었다. 그런데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줄곧 반말을 했다. 현지가 지나치게 반기는 바람에 들뜬 나머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뭘까? 갑자기 현지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은. 마치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을 대하고 있는 기분이다.
“너 이상하다. 진짜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그래? 아까 왜, 이 집에 귀신인가 뭔가 있다고 하면서 지가 무슨 퇴마록에 나오는 현암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화인지, 전환인지를 하러 왔다던 그 미친놈 말이야. 너 아까 그 자식 때문에 깜짝 놀랐었잖아. 나도 너 아니었으면 그 자식이 있는지도 몰랐었다고. 이제 기억이 나니?”
“그래서?”
착각일까? 현지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 같은 붉은 기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계속 말해봐.”
낮게 깔리는 목소리, 매서운 눈초리로 다그치는 모습이 현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래서라니? 뭐가. 그래서야. 너 정말 왜 그래. 마치 딴 사람 같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놈 어디로 갔는데. 어서 말해봐! 어서!”
현지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면서, 그 붉은 기운이 점점 선명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현지야, 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무섭잖아”
내가 물러서려 하자, 현지가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가녀린 몸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콜록거리며 고통을 호소했지만 현지는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세게 조였다.
“켁, 켁! 이 손 좀 놔, 숨을 못 쉬겠어. 현지야. 이 손 좀…….”
“말해! 그 놈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가까스로 현지의 손을 뿌리치고 등에 벽이 닿을 때까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을 쳤다.
“허억, 허억! 너 미쳤어? 이현지! 나야, 나. 성일이 오빠라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큭큭큭, 어리석은 놈. 아직도 내가 네 애인인 줄 착각하나 보지?”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갑자기 현지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해버렸다. 아니,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뒷걸음을 치려고 했지만 벽을 등지고 서 있어서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제대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왜 그래. 장……장난치지 마. 현……현지야.”
히죽, 현지가 거의 귀밑까지 찢어질 정도로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을 뒤흔드는 웃음소리에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