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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주말여행

by 이상민 NIRVANA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박 교수는 서툰 솜씨로도 정성을 다 해 김밥을 쌉니다.
오늘은 아내와 주말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11월 중순이라 겨울의 초입에 이른 날씨이지만 오래 전에 한 약속이라 미룰 수 없습니다.
무려 8년 전에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겁니다. 그동안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 과제를 수행하느라 짬을 내지 못했습니다.
박 교수는 올 봄에 정년퇴임 1년을 앞두고 사직한 이후로 가능하면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가정에 소홀했던 그였기에 이제라도 아내에게 보은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30년 간 아내를 혼자 두었던 게, 늘 마음에 걸려섭니다.
사실 그의 아내, 정선임 여사는 현재 건강이 몹시 나쁩니다. 그러기에 박 교수에게 아내와 보내는 매일, 매일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일부러 차를 놔두고 박 교수는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습니다.
차창을 내다보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정 여사가 박 교수에게 말했습니다.


“오빠, 옛날 생각나요. 그때도 이렇게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떠났었는데. 기억나요?”
“그럼, 기억 나고, 말고.”


박 교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드디어 정동진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젊은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적한 카페를 찾아 박 교수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랜 만에 예전으로 돌아가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미리 예약한 숙소로 가서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날 일출을 보기 위해섭니다.
박 교수는 혹시라도 알람을 듣지 못할까봐 싶어서, 안락의자에 앉아 잠든 아내를 지켜보며 밤을 새웁니다. 어린아이처럼 쌔근쌔근 코를 고는 아내의 모습은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겨울밤인데도 박 교수에겐 무척 짧게 느껴졌습니다.




어느덧 동틀 무렵이 다가왔습니다.
박 교수는 옷을 챙겨 입고 아내를 흔들어 깨웁니다.

“선임아, 곧 해가 떠. 일출 보기로 했잖아.”

박 교수는 정말로 오랜만에 아내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생소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내는 아이처럼 졸린 눈을 비비며 눈을 떴습니다.

“일출 보러 가자.”

박 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내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두 사람은 이곳에 왔을 때처럼 다정하게 손을 잡고 숙소를 나옵니다. 그리고 일출을 보러 천천히 걸음을 옮깁니다. 건강 상태가 많이 나빠진 박 교수의 아내는 빨리 걷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조금 이르게 아내를 깨웠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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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동해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내가 살며시 박 교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나직이 속삭입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현우 오빠.”
“응, 나도 사랑해.”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박 교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애써 참으려고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 교수의 이름은 박성일입니다.

현우는 아내의 첫사랑이었던 박 교수의 선배 이름이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는 언제부턴가 남편인 박 교수를 첫사랑인 현우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박 교수는 한 번도 부정하거나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에.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두 부부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박 교수는 그사이에 잠든 아내를 깨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든 아내를 가만히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리 죽여 오열했습니다.
혹시라도 아내가 들을까봐.




며칠 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홀로 집에 돌아온 박 교수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작은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상자 뚜껑에 ‘잊지 않기’라고 쓴 예쁘장한 글씨는 아내의 필체가 분명했습니다.
박 교수는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나눈 편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포스트잇을 붙여 ‘잊지 말기’라고 써놓았습니다.
사진들을 훑어보던 박 교수는 어떤 사진을 발견하고는 감정에 복받쳐 입을 틀어막고 말았습니다.
정동진에서 찍은 그 사진에는 젊은 시절의 박 교수와 현우 선배 사이에 끼어 두 사람의 팔짱을 낀 아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박성일 ♡ 정선임 1970.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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