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가을에 열린 열매는
그녀의 집 마당에는 오래전 그녀가 할아버지와 함께 심어놓은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부터인가 그 나무에서는 감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이웃집에 살았습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는 늘 너머로 그녀를 지켜보곤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녀가 웃으면 그도 따라 웃고 그녀가 울면 그도 따라 울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길들여져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다.
그녀는 나이를 먹어 갔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역시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의젓한 청년이 되어습니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주말마다 남자친구를 곧잘 집으로 데려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전 할아버지와 심었던 나무아래서 사랑을 다짐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 나무에서도 감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아직은 그녀를 지켜 볼 수 있기에.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이웃집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필요할 때마다 그녀의 말벗이 되어 주곤 했습니다. 동갑이면서도 더 어른스런 그가 때로는 오빠 같고 때로는 친구 같고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요즘은 왠지 멀어지는 것 같다고.
그는 그녀의 오랜 친구라는 사실이 행복하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그에게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남자 친구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라서 슬프다고. 그는 고민을 들으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이게 아니야, 난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잖아.
결국, 그녀는 애인과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우연이었을까? 그때부터였습니다, 감이 열리지 않은 시기는,
그녀는 마음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해 가을, 처음으로 감나무에 감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슬픔에 감화되어서일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달라진 점은 더 이상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애인은 아니지만, 이웃집의 친구가 있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찾았습니다.
그는 기뻤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녀가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녀에게 이유는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찾았다는 사실에 그는 만족했습니다. 이것으로 다 잘 된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군대를 가야할 날이 온 것입니다.
오랫동안 공부를 위해 미뤄왔던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더는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두고, 이제 입대를 해야 합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또 그 기회를 잃은 것 같았습니다.
올해도 감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가 군대를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왜 일까? 이 허전함은.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그는 그 해 가을이 끝날 무렵에 군대를 간단다. 그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그와 떨어져본 적이 없으므로.
이제 내일이면 그가 군대를 갑니다. 그러면 한동안은 그를 볼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은데, 입가에 맴돌기만 합니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를 떠나보내기가 싫었던 겁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녀는 늦잠을 잤습니다.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창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신을 신는 것도 잊은 채 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나무에, 나무에, 가지마다 하얀 종이쪽지가 묶여져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쪽지를 아니, 오랜만에 찾아온 열매를 땄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것이라고.
그가 남긴 메시지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를 만나려고 서둘렀지만, 이미 그는 역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 동행 없이 홀로 열차를 탔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 그녀가 배웅하러 오진 않을까.
열차 시간이 다 되었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녀에게 충분히 자기 마음을 전했으므로,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녀가 역에 도착했을 땐, 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의 온기가 남아있을 그 의자에. 그리고 그를 추억했습니다.
몇 해가 흘러 다시 감나무에 감이 열렸다. 수액주사를 놓고 정성껏 가꾸니 죽어가던 나무가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바로 오늘, 그녀와 그는 두 사람의 아기와 함께 또 다른 나무를 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