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감입니다
석훈은 커피숍 입구에서 심호흡을 합니다.
오늘은 그녀에게 수화를 배우는 날입니다.
사실 수화를 배우는 건 핑계에 불과합니다. 몇 달 전에 서양화를 그리는 대학 동창의 첫 전시회에 우연히 그녀를 만난 뒤로 석훈은 열병을 앓았습니다.
첫 눈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석훈이 반한 그녀는 어릴 때 심한 병을 앓고 청각을 잃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밝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때때로 그녀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석훈은 어떻게 하면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무턱대고 수화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석훈의 응석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석훈은 매주 수요일마다 그녀를 만나 수화를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시작한 것이지만 어느 순간 석훈은 수화를 배우는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녀에 대한 감정도 점점 깊어졌습니다.
석훈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녀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름 사람에게 보여주는 미소와,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보이는 미소가 사뭇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석훈은 이따금 그녀에게 전시회를 같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어쩌면 그녀도 석훈과 함께 하는 시간이 싫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석훈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벌써 수화를 배우기 시작한 지도 넉 달이나 지났습니다.
그사이에 석훈은 제법 수화에 능숙해졌습니다. 수화를 배운다는 핑계로는 그녀를 만나기 힘들다는 걸, 석훈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녀에게 자기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심호흡을 몇 번이고 하면서 마음을 다스린 석훈은 문을 힘껏 열고 커피숍으로 들어갔습니다.
늘 그렇듯, 그녀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석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어서일까요.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자꾸만 떨리고, 호흡도 거칠어집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뒤늦게 석훈을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수화로 석훈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석훈도 웃으면서 그녀에게 수화로 답했습니다.
음료를 주문하고, 두 사람은 평소처럼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가 문득 수화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더 가르칠 게 없을 정도로 수화를 잘하시네요.’
순간 석훈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마치 더는 만날 필요가 없다는 듯, 이별 통보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석훈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더 배우고 싶다고 둘러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고개를 흔들면서 지금도 충분히 잘한다고 칭찬을 합니다.
석훈은 침울해졌습니다.
그리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화장실을 다녀온 석훈은 자리에 앉자마자 너스레를 떨며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수화를 물어볼게요. 괜찮죠?”
그녀는 웃으면서 수화로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수화로 어떻게 하는 거였죠? 좀 더 진심을 다해서 표현하려면요.”
순간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석훈이 원하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때 석훈은 수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감입니다.’
그녀가 당황하자, 석훈은 이어서 이렇게 수화로 말했습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정말로 좋아해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동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