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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

by 이상민 NIRVANA


제현은 몇 번이고 시계를 보며 초조해합니다. 상하 행할 거 없이 차도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이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다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스키장으로 가는 길목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제현은 한겨울인데도 차창은 모두 열어놓았습니다. 애써 준비한 선물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룸미러에 걸어둔 사진을 봅니다.
유치원 때부터 짝꿍이었던 수경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두 사람은 20년이란 세월을 함께 보낸 사이입니다.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배려하고 아껴주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가깝게, 당연하듯 만나왔기 때문인지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우정인지, 사랑인지, 아니면 습관처럼 길들여진 감정인지.
다투기도 많이 다퉜고 때로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기 때문에 결코 사랑은 아니라고 믿었던 적도 있습니다.


매번 연애에 실패하면 당연하듯 서로 곁을 지켜주면서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 감정은 단순한 우정은 아니구나, 하고.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편하게 지내왔기 때문인지 누구도 먼저 그 감정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눈치만 보고, 아닌 척하고, 일부러 더 짓궂게 굴고.
그렇게 서로 상대가 먼저 마음을 말해주길 기다렸습니다.
친구처럼 지내다가 감정을 고백한다는 건, 제현이나 수경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칫 섣부르게 이야기를 꺼냈다가 좋은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서로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누군가는 지치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 수경이 불쑥 말을 꺼냈습니다.


“엄마가 선보래. 엄마 말로는 꽤 괜찮은 남자인가 봐. 어떻게 할까?”

“그래? 잘 됐네. 좋은 사람 같으면 한 번 만나봐. 이번에는 꼭 잘 되길 바랄게.”


제현은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럴게. 걱정하지 마. 너도 빨리 좋은 사람 찾아봐. 먼저 간다.”

수경은 쌀쌀맞게 대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수경은 제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현의 연락에도 답하지 않았고.
제현은 불안해졌습니다.
수경이 맞선을 본 남자와 잘 지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수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경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내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한 달쯤 지나서, 수경이 맞선을 본 남자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현은 지금이야말로 마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제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차를 몰아 서울에서 가까운 스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경에게 전해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언젠가 술을 마시면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있잖아.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는 게 소원 중 하나다. 왜 우리나라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안 내릴까?”

“그런가? 하긴, 나도 크리스마스 때 눈이 내리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네.”


회상에 잠겼던 제현은 갑자기 쏟아지는 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맞은편에서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제현은 황급히 핸들을 꺾어 트럭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트럭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누군가가 구급차를 부른다고 했습니다.
제현의 머리에선 피가 흘렀습니다.
하지만 제현은 자기 몸은 돌보지 않고 승합차 짐칸부터 확인했습니다. 너무나 다행히도 수경에게 줄 선물은 무사했습니다.
제현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차를 몰았습니다.





밤새 차를 몰아 마침내 수경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제현은 수경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나야, 집에 있는 거 알아. 나와 봐.”

그러고는 제현은 전화를 끊고 수경을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대문이 열리고 수경이 나왔습니다.

“이 시간에 뭐야. 너무 늦어…….”

순간, 수경은 말을 잃었습니다.


대문 앞에, 회색으로 바랜 커다란 눈사람인공눈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습니다.

제현이 스키장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몇 시간 동안 준비한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제현이 다가와 인사했습니다.
수경은 한동안 말없이 제현의 선물을 지켜보았습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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