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인의 사랑>
굉장히 낯선 영화를 봤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이기에, 낯설다는 표현이 어쩌면 적합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수식이 떠오르지 않아, 낯설다는 표현을 고수하고 싶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제목을 보고 떠올린 ‘아마도 이럴 것이다’라는 예상을 여지없이 벗어나버린다.
마흔의 남자가 있다.
그는 시인이며, 가장이다. 요즘 말로는 루저에 가까운 삶을 사는 자존감 낮은 남자다. 시인으로서도, 한 여자의 남편으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다.
시인이지만, 시가 써지지 않는 그의 고민은 많은 작가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잘 써지던 글도 탁탁 막히기 일쑤다.
그건 우리 삶에서 흔히 찾아오는 슬럼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작중 시인이 느끼는 무게는 으레 찾아오는 슬럼프 이상의 중량감이 다가온다. 그에겐 세상 누구보다 그를 지지하는(매일 구박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만, 불행히도 시인은 그마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흔한 표현으로 ‘무쓸모’인 남자인 거다.
그런 그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어쩌면 시인보다 더 힘겨운, 세상에 이런 불운한 사람 또 없을 것 같은 삶을 사는 소년.
영화는 갑자기 ‘퀴어 코드’를 살짝 보여주면서 관객들(나 또한)을 당황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말로 퀴어 영화인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순간, 순간 드러나는 시인의 욕망이 육체적인 갈구인지, 아니면 연민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평가는 오롯이 관객의 몫인 셈이다.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참으로 낯설다.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주 생소하거나 특별하진 않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흔한 타인’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많은 질문과 사유를 하게 만든다.
제목도 그렇듯이, ‘사랑’에 대한 정의가 굉장히 포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주 엉뚱하면서도, 때론 불편하고, 때론 유머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재관람을 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 영화가 낯설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조금 더, 조금 더, 지켜보자.
사랑이 그러하듯, 시간이 필요하다.
시인을 연기하는 배우로서의 양익준은 옳다. 하지만 ‘똥파리’라는 걸출한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 양익준이 더 그립다. 차기작은 그의 출연작이 아닌 연출작이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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