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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NIRVANA Oct 23. 2017

너무 깨끗하면 오염되기 쉽다

영화 <유리정원>

우연히 길을 가다가 옛 지인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참 오묘하고 복잡하다. 

아마도 익숙함과 낯선 감각이 혼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렴풋이 옛 모습도 남아있겠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마모되어 변해버린 모습도 있을 테니 말이다.

아역으로 시작한 배우가 성인 연기를 펼칠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를 테면 한때 국민 여동생이라고 불렸던 문근영이 그렇다. 

어린 신부에서 김래원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게 어느덧 13년 전의 일이다. 여전히 앳된 모습이 남아있는 그녀이지만, 세월은 그녀를 더는 여동생이 아닌 여인으로 변화시켰다.

그동안 적지 않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났던 그녀이지만 딱히 ‘성인 연기자’라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스크린 나들이를 한 이번 ‘유리정원’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만큼은 이제야 문근영도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근영이 연기한 ‘재연’은 지금껏 그녀가 맡았던 역할과는 사뭇 달라서, 생경하기까지 한 캐릭터였다. 그럼에도 묘하게도 문근영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는 재연은 스스로 벽을 만들어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해 자신만의 영역 안에서 살아간다. 

아역 연기자들의 삶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그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또래와는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자기들만의 영역을 긋고 살았을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유독 이 영화에서 보여준 문근영의 모습이 단순한 연기라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자화상처럼 와 닿았는지 모른다.



영화 속의 재연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확신하는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 속 대사에도 나왔듯이 너무 순수하고 투명한 것은 오염되고 오해 받기 쉽다.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그녀의 순수를 오해하고 곡해한다. 끝내는 그녀를 광인으로 몰아간다. 

너무나 순수한 사람은 살아가기엔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유리정원>은 올해 관람했던 그 어느 영화보다도 내게는 불편하고 무거웠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결말부에 문근영의 대사가 유독 귓가에 맴도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나무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가지를 다른 방향으로 뻗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서로를 죽이니까.”


재연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나무가 되고 싶었던 이유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상처 주기 싫어서, 순수를 유지하고 싶어서. 

사실 그녀는 너무 외로웠던 것이다.

내심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오염되기 쉬운 순수를 지녀서 두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순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순수는 오롯이 그 존재를 유지하기 어렵다. 자의가 아니더라도 타의에 의해서 변질되고 왜곡된다. 그것이 악의든, 질시든, 혹은 우발적인 사고였든. 세상은 맑고 투명한 순수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 눈을 지닌 이가 괴물 취급을 받는 것처럼, 이 세상에선 순수라는 것은 더는 존재할 수 없는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영화는 그렇게 오해와 순수, 그리고 쉽게 퇴색해버리는 인간의 감정을 나무라는 메타포로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누구나 가슴 속에는 ‘유리정원’을 가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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