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아파트에서 나는 다시 그 소리를 들었다.
벽시계의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진동이 일었고, 방 전체를 울렸다. 누군가 시간의 틈새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착각이길 바랐으나 소리는 계속됐다. 매일 밤 정확히 새벽 2시 27분에 시작되어 47분이면 끝났다.
이 20분 동안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숨도 쉴 수 없었다. 소리가 멈추면 시간도 함께 멈춰버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멈춰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20분 동안은 시간이 다르게 흐르니까. 시곗바늘은 움직이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혹은 시간은 흐르지만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 때면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도시의 불빛이 깜박이지 않는다. 가로등도, 네온사인도, 자동차의 미등도 모두 정지해 있다. 도시 전체의 전원이 꺼진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녀가 사라진 다음 시작됐다. 작년 겨울, 그녀는 내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늘 만나던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날따라 가게는 비어있었고, 창가엔 검은 코트를 입은 낯선 남자 한 명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시간을 살 수 있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늘 그렇듯 그녀의 목소리엔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농담이 아니었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얼마나요?“
“20분이면 돼요. 매일 밤 정해진 시간의 20분만.”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선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때로는 더 빠르게, 때로는 더 느리게.
창가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계산대 앞을 지나칠 때 시계가 2시 27분을 가리켰다. 카페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커피머신의 작동음도, 음악도, 사람들의 숨소리까지도.
”계약서를 쓸까요?“
그녀가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A4용지 반 장 분량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나는 매일 새벽 2시 27분부터 47분까지의 시간을 그녀에게 판다. 대가로 그녀는 내게 시계를 주었다. 오래된 회중시계였다. 표면은 흐릿하게 바랬지만, 초침은 정확했다.
”이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시계예요. 하지만 딱 한 번뿐이에요. “
그녀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진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만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튀니지의 사막 한가운데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사람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분명 그녀에겐 가장 진실된 세계였다.
계약 후 일주일 만에 그녀는 사라졌다. 아파트엔 빈 커피잔과 회중시계만 남았다. 시계는 멈춰있었다. 2시 27분을 가리킨 채.
소리가 시작되었다.
매일 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세상의 모든 시계가 멈췄다. TV도, 전화기도, 컴퓨터도 모두 작동을 멈췄다. 그 20분 동안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분리된 시간의 틈.
두려움은 어느새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20분 동안 나는 완벽한 고립 속에 있었다.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시간. 그녀가 만든, 그녀가 된 시간.
실험을 해봤다. 물을 따르자 물줄기가 공중에 멈췄고, 책장을 넘기면 종이가 공중에 떴다. 시간이 멈춘 건 세상이었지 나는 아니었다.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지나갈 정도의 금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벌어졌다. 이제는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벌어졌다. 균열 속은 칠흑이었다. 하지만 가끔 그 안에서 빛이 반짝였다. 누군가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균열 속을 들여다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움직임을 발견했다. 희미한 형체가 사람의 모습인지 시계추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 그 안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 시계를 돌리지 않았네요. “
그녀의 목소리였다.
나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직도 2시 27분에 멈춰있었다. 시계를 되돌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결국 무엇이 달라진다는 걸까.
균열은 이제 내 키보다 커졌다. 벽은 누군가가 도끼로 내려친 것처럼 갈라져있었고, 이 틈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시간의 온도였다.
오늘도 2시 27분이 다가온다. 나는 회중시계를 손에 쥐고 있다. 균열 속에선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이것은 출구일지도 모른다. 또는 입구.
시곗바늘이 움직인다.
진동이 시작된다.
나는 숨을 멈춘다.
기다린다.
시간의 틈새로 스며들 그 순간을.
벽에 귀를 대면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그녀일까.
아니면 또 다른 나일까.
나는 시계를 든다.
이제 바늘을 돌릴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