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993

경찰 223

by 임월


4월의 비가 홍콩을 적신다. 네온사인이 웅덩이 위로 쏟아져 빨강, 파랑, 초록이 섞여 새로운 색을 만든다. 223번 경찰이 그 빛을 밟으며 걷는다. 발자국마다 색이 퍼진다. 어어, 시간도 이렇게 번지나.


그는 얼굴을 들어 빗방울을 맞는다. 안경에 빗물이 맺히지만 닦아내지 않는다. 세상이 번져도 괜찮을 때가 있다. 오늘처럼, 그녀가 떠난 지 16일째 되는 날에는.


구멍가게 진열대 앞에 파인애플 통조림이 쌓여있다. 5월 1일까지. 32개를 산다. 사랑이 변질되기까지의 시간을 재는 중이다. 가게 주인은 묻지 않는다. 매일 같은 손님, 같은 물건. 도시에서는 이런 반복도 익명이 된다.



만 년.


그가 중얼거린다.


기억의 유통기한을 정한다면


만 년은 필요하다고.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상상한다. 만 년 후의 홍콩을. 지금의 건물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새로운 탑들이 솟아 있을까. 그녀의 분자들은 다른 형태로 존재할까. 자신의 기억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홍콩 해협은 말라붙고, 네온의 색은 변하지만, 오직 시간만이 같은 속도로 흘러갈 것이다.


슈퍼마켓 냉장고에 비친 얼굴이 낯설다. 수염이 자라고 눈밑에 그림자가 졌다. 시계가 4월 16일을 가리킨다. 앞으로 15일. 파인애플 32개를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딱 맞는데. 벌써 17일째다. 계산이 틀어졌다. 통조림 두 개를 더 집어 들고 계산대 앞에서 동전을 센다. 직원은 지루한 얼굴이다. 아무도 이 숫자들의 의미를 모른다.


홍콩의 골목길을 걸으며 빗물 웅덩이를 피해 간다. 골목은 좁고 숨 자리도 부족하다. 길가 포장마차에서 향신료 냄새가 나고, 저녁 무렵의 습한 공기가 옷깃을 적신다. 경찰 배지가 무겁게 가슴을 누른다. 배지의 무게와 그녀의 부재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야간 순찰. 무전기가 지지직거리며 도난 사건을 보고한다. 살인 미수도 보고된다. 모든 범죄는 사랑의 다른 형태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너무 사랑했거나,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거나. 그는 범죄자들을 이해한다. 분노를, 상실을, 그 비어있음을.


금발의 살인자가 나타난 건 그때였다.

구멍가게 앞, 담배 연기 속에서


선글라스 너머로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223번 경찰은 자신의 모습이 그 검은 렌즈에 비친다고 상상한다. 금발 여자가 통조림 주스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인다. 4월 17일. 파인애플 통조림이 하나 줄었다.


배지를 만지니 223번 숫자가 흐려진다. 비에 젖어서일까, 눈물 때문일까. 통조림을 하나 더 열어 달콤한 파인애플을 입에 넣는다. 첫사랑의 맛은 어땠을까. 끝맛은 금속성이다. 통조림 캔 때문일까, 권총 때문일까. 첫사랑은 이제 총알이 되어 가슴 한구석에 박혀 있다.


등 뒤로 홍콩의 밤이 번져온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니 벽에 반사된 네온이 춤을 춘다. 파인애플을 삼키고 기도한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를. 기도는 에어컨 소리에 묻혀 사라진다.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네온은 계속 빛나고 빗물은 계속 흐르며 기억은 계속 발효된다.


새벽 2시. 달린다. 비는 그쳤다. 땀이 등을 적시고 심장이 둔탁하게 울린다.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것만 같다. 섬이 그를 붙들고 있다. 항구의 불빛이 떨리고, 멀리 유람선이 지나간다. 그 배에 그녀가 있을까. 어떤 바다로 향하고 있을까.


캘리포니아 바에서 술을 마신다. 바텐더가 묻는다.


"여자친구는요?"


"4월 말까지예요."


"그게 무슨…"


"유통기한이니까요."


바텐더는 웃는다. 농담으로 들었나 보다. 223번 경찰은 술을 더 마신다. 아무도 모른다. 사랑이 어떻게 썩어가는지, 기억이 어떻게 독이 되는지. 파인애플 향 칵테일을 주문하니 바텐더가 고개를 젓는다. "메뉴에 없어요." 223번 경찰은 웃는다. 이 세상은 없는 것이 많다. 파인애플 칵테일처럼, 영원한 사랑처럼.


심야의 거리를 달리며 도망치는 범인을 쫓는다. 진짜로 쫓는 건 뭘까. 사라진 사랑인가, 흘러간 시간인가, 아니면 홍콩의 밤? 멈춘다. 범인은 골목 저 끝으로 사라졌다. 쫓지 않는다. 오늘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 범인도, 그녀도, 시간도.


발밑 웅덩이에 네온이 반사되어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얼굴이 물에 비쳤다가 사라졌을까.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낸다. 빗물에 번진 그녀의 얼굴이 있는 사진을. 락커에 숨겨둔 것을 몰래 가져왔다. 그녀는 웃고 있다. 뭔가를 알고 있는 표정으로.


편의점에 들러 통조림 코너 앞에 선다. 파인애플, 복숭아, 오렌지. 과일들이 달콤한 시럽 속에 갇혀있다. 유통기한을 확인한다. 과일은 언제 썩을까, 사랑은 언제 끝날까. 점원이 졸고 있다. 도둑이 들어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누가 통조림을 훔칠까. 권총을 만진다. 차갑다. 금속은 기억을 갖지 않으니.




아파트로 돌아와 머리를 말린다. 거울 속 남자가 그를 보며 눈으로 묻는다. "그녀를 찾았나?" 대답할 수 없다. 전화가 울린다. 심야의 전화는 언제나 불길하다. 수화기를 들어도 침묵뿐이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환청일까. 유통기한이 가까운 파인애플은 환각을 일으킨다고 했던가.


금발의 살인자가 웃는다.


"당신은 왜 이렇게 슬퍼요?"


"슬프진 않아요."


"눈물이 났는데요."


파인애플 시럽이 턱으로 흐른다.


그녀의 방에서 밤을 보낸다. 그녀는 위스키를 마시고 223번 경찰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연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가 있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는 관계가. 그녀의 금발이 홍콩의 밤에 빛나고, 창밖으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그녀의 눈이 그것을 쫓는다. 모두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한다. 홍콩에서, 기억에서, 유통기한에서.


날짜를 세어본다. 4월 1일부터 30일까지, 통조림 32개, 먹은 것 17개, 남은 것 15개. 계산이 맞지 않는다.


책상 위에 통조림을 늘어놓는다. 파인애플이 만드는 별자리. 네온이 그 위로 떨어지고, 달력을 본다. 4월 17일. 그녀가 떠난 지 17일째. 남은 파인애플은 15개, 달력의 남은 날은 14일. 하루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하루가 생겨난 건지. 시간은 이런 장난을 친다.


시간도 이렇게 어긋나나.


사랑도 이렇게 새나가나.


기억은 어디로 흐르나.


금발 여자는 떠난다. 그녀의 방에 남은 담배 연기 속에서 223번 경찰은 생각한다. 그녀도 누군가의 유통기한 속에 살고 있을까. 모든 사람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건 아닐까. 창문을 연다. 도시의 습한 공기가 들어오고 그녀의 향수가 섞여 있다. 살인자의 향기.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경찰서로 돌아간다. 동료들이 묻는다. "어디 있었어?" 말할 수 없다. 살인자의 품에 있었다고? 과거의 무덤을 파고 있었다고? 동료가 웃으며 말한다. "4월도 끝나가네." 고개를 끄덕인다. 유통기한이 다가온다. 파인애플의, 기억의, 그녀의, 그리고 그 자신의.


비가 그친다. 네온이 선명해진다. 마지막 통조림을 연다. 시계를 본다. 4월 30일 오후 11시 59분. 곧 모든 것의 유통기한이 끝난다. 파인애플을 입에 넣는다. 달다. 너무 달아서 혀가 마비될 정도다. 그녀의 키스처럼. 모든 감각이 무뎌진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홍콩의 공기, 4월의 마지막 공기를.




파인애플 향이 퍼진다. 홍콩의 밤거리에 첫사랑의 향수가 섞인다. 금발의 살인자가 사라지고 시간이 흐른다.


창문을 연다. 홍콩의 야경이 눈부시다. 수천 개의 불빛이 바다 위에 떠 있다. 별들처럼. 이 불빛들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까. 첫사랑이, 금발의 살인자가. 시계를 본다. 자정이 지났다. 5월 1일이다. 유통기한이 지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 통증은 여전하고 기억도 여전하다.


223번 경찰은 안다.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없다는 걸. 사랑도 시간도 기억도 그저 발효되어 간다는 걸.


옥상으로 올라간다. 빈 파인애플 통조림 캔을 들고. 항구가 내려다보인다. 1997년이 다가오고 있다. 홍콩도 곧 변할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빈 캔을 던진다. 캔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날까. 첫사랑을, 금발의 살인자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까. 새 캔에 담긴 새 파인애플처럼. 아니면 모든 것이 사라질까.


저 멀리 새벽이 온다. 5월의 첫날이 밝아온다. 유통기한은 끝났지만 기억은 계속된다.


경찰 배지를 만진다. 223번. 숫자가 손바닥에 새겨진다. 운명처럼, 지문처럼,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는 걷기 시작한다. 5월을 향해, 다른 기억들을 향해. 또 다른 통조림을 향해.




홍콩의 새벽하늘에


파인애플 빛 노을이 번진다.






keyword
임월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901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