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993

페이드 어웨이

by 임월

눈송이가 창가를 두들기며 흩어진다. 첫눈이 내리는 저녁이다. 닫힌 창문 너머 바람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깬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부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겨울의 한기가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그녀는 창문에 손을 대고 흩날리는 눈을 바라본다. 빛바랜 하늘과 어둠이 맞닿은 경계에서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 지워진다.



낡은 턴테이블이 겨울의 시계처럼 돌고 있었다. 바늘이 LP의 검은 강을 건너는 동안, 기타의 여운과 낮게 깔린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소리가 벽을 적시고, 공기를 물들이고, 시간을 녹이고 있었다. "Don’t know why… fade away…" 음악은 같은 구절을 반복하며 맴돌았다. 선율이 돌아올 때마다 공간은 조금씩 다른 빛깔을 띠었다. 그녀는 담배 없는 손끝으로 공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후렴구가 돌아올 때마다 그녀의 숨이 창유리에 서렸다.


"좋지 않아? 이런 날씨에 이런 노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는 맑고 가벼우면서도 안에 무거움이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된 LP의 긁힌 자국처럼, 그녀의 음성이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울림을 만들었다. 말의 끝자락이 방 안을 진동시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바라봤다. 창가에 서 있는 그녀의 옆모습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가까운 모습이지만, 동시에 가장 멀게 느껴졌다. 그녀의 윤곽이 점점 희미해진다.



우리의 첫 만남도 이런 겨울이었다.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서 나는 머그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턴테이블 옆에 앉아있던 그녀가 LP를 골랐다. 검은 원반을 들어 올리는 손끝이 떨렸다. 바늘이 내려앉는 순간, 시간이 멈췄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음악을 들었다. 오랜 친구와 재회한 것처럼.


말을 걸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여러 번 망설이다가 내게서 먼저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좋아하는 곡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깊은 눈동자가 나를 지나갔다. "들어보세요. 마음에 들면 좋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카페 안을 떨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보다 음악을 선택했고, 내가 무언가를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장의 LP를 골랐다. 턴테이블의 바늘이 내려앉을 때마다 새로운 기억이 열렸다.


"이 곡, 네 기분 같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정말로 그녀가 고른 곡들은 내가 말하지 못한 감정을 정확히 들려주었다. 음악이 우리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 그녀의 방에는 같은 노래가 끊임없이 울린다. 시간은 반복 속에 갇혀 있다. "왜 이 곡이야?"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눈 같아서. 가볍게 떨어지다가, 조용히 녹아들잖아." 그녀의 말 끝에 ‘우리처럼’이라는 말이 숨어 있었다. 침묵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 그녀는 이미 떠나고 있었고, 우리는 서로에게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창가로 걸어갔다. 그녀의 어깨 위로 흩어진 빛이 닿아 있었다. 빛은 부서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가지 마."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눈빛 속에는 슬픔과 애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어." 그녀가 말했다. "붙잡으려 하면 더 빨리 녹아버릴 거야."


그녀는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눈송이들이 그녀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기타 선율과 목소리가 여전히 공간을 떠돌았다. 창가에 다가서니 바깥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은 이미 지워져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그녀의 LP를 다시 턴테이블에 올렸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Don’t know why… fade away…"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선가 이 눈처럼 녹아내리고 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지워지면서도,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자 찬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었다. 눈송이가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처럼 스러져간다. 나는 다시 바늘이 만드는 겨울 속으로 잠겨 들었다.






keyword
임월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901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