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하나가 물에 잠겨 있다.
설거지를 미루고 잠시 담가둔 것인데,
시간이 흐르자 물 위에 먼지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무심히 흘려온 날들이 고인다.
물을 버리지 않고 조금 더 둔다.
그릇에 베인 손자국, 입술의 흔적,
나눴던 식사의 기억까지
담겨 있는 듯하여.
해진 수건은 더 이상 물기를 닦지 않는다.
금이 간 찻잔은 마시기보다 바라보고,
바닥이 닳은 나무 스툴은
묵은 신문을 쌓아둔 채 삐걱거린다.
물건들은 어느 날 제 역할을 잊고,
기억으로만 남는다.
어릴 적 집에는 노란 전화기가 있었다.
버튼을 꾹 눌러야 연결되는 기계.
전화가 울릴 때마다 창틀이 떨렸고,
가끔은 수화기를 들어
단조로운 기계음에 귀를 기울였다.
삐— 하는 소리일 뿐인데,
그 단순한 울림이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처럼 다가왔다.
집 안에는 가끔 낯선 냄새가 스며든다.
익지 않은 과일의 풋내,
기름에 젖은 저녁,
비에 젖은 셔츠의 냄새.
사라진 뒤에도 냄새는 벽에 스민다.
닦아내지 않고 남겨둔다.
지우는 것보다
기억하는 편이 덜 고단할 때가 있으니까.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
그저 나란히 걷는다.
꿈에서 깨어나면 목소리는 사라지고,
함께 걷던 감각만이 몸에 남는다.
설명되지 않는 온기.
어느 틈에 흘러들어와, 가만히 머문다.
누군가 같은 자리에 앉아 잔해를 만진다.
따뜻하거나, 부드럽거나, 아픈 잔해.
어떤 온도는 식혀지지 않고,
어떤 물건은 쓸모를 잃어도 버려지지 않는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