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후, 전화기를 열세 번쯤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번호의 첫자리까지만 쓰고 멈춘다. 이어질 숫자는 다시는 이어지지 않았다. 창밖의 눈은 쌓였고, 말하지 못한 것들도 위에 겹겹이 쌓여간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문장들이 있었다. 작은 흰 조각에 실려 닿을 수만 있다면. 단 한 번만 허락된다면,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창에 서린 김을 지워낸 자리에 당신이 지난다. 후드 속의 머리카락, 발목까지 차오른 눈을 밟던 소리, 입김으로 부풀던 공기. 어제의 장면도 아닌데… 책상 위엔 구겨진 편지지가 일곱 장 흩어져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잉크는 번지고, 문장은 종이 위에서 자꾸 끊긴다. 너의 집 창가에 불이 켜졌다가 금세 꺼진다. 그 점멸 하나에 또 흔들린다.
하늘에 당신의 이름을 그려보았다. 검지로 한 획씩 긋다가 손바닥으로 덮어 지운다. 다시 쓰고 또 지운다. 남은 건 전하려는 마음뿐, 전할 길은 없다. 대신해 줄 것이 있다면. 저 흰 것들이나, 바람이라도.
편지는 줄고 줄어, 일곱이 셋으로, 셋이 다시 하나로 쪼그라들었다. 줄수록 비워지고, 비워질수록 더 남는. 코트 속의 작은 상자가 어깨를 누른다. 몇 걸음 다가갔다가 멈춘다. 다시 걸었다가 돌아선다. 어떻게 건네야 짐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 주어야 다시 받지 않아도 될까.
바라며 건네는 선물에는 보이지 않을 조건이 붙는다. 답장을 해주기를, 전화를 걸어주기를, 마음을 알아주기를. 기대는 어깨를 무겁게 했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서. 진짜 선물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데 있는 걸 아는데. 답장이 없어도, 기억되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건네는 것. 그런 선물은 가볍다. 누구도 묶지 않는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물러서는 것.
모든 관계가 주고받음으로만 설명되진 않는다고 믿는다. 때로는 돌아오지 않는 길도 필요하다. 어떤 이는 그것을 허무라 부른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내어주는 일은 내게 중요하다. 그래야만이 채워지는 무게가 있어서.
사람들은 흔적을 붙들려했다. 반짝이는 반지와 사진 속 웃음, 날짜가 새겨진 상자 같은 것들. 그러나 오래 살아남는 건 눈발처럼 스친 장면들이다. 증명할 수 없어서, 더 지워지지 않았다.
종이 한 장을 접고서는. 이름은 쓰지 않았다. 주소도 적지 않았다. 빈 종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언젠가 건네고 싶겠지만 건네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은 이 종이처럼 접혀 있다. 펼칠 이는 없어도. 밤이 스스로 닫히며 눈발이 멎는다. 창문을 닫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구겨진 종이를 버렸다. 주머니의 선물을 다시 만졌다. 아마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일 것 같다. 조건 없는 마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주고 싶었다. 돌려받지 못해도, 대답이 없어도, 기억되지 않아도.
받는 건 손을 펴면 그만이었다. 주는 건 온 마음을 다해야 했다. 더 어려운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일이었다. 모든 걸 담아냈지만,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가볍게,
골목에 쌓인 눈을 모아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내일이면 녹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당신 창을 향해 앉아 있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당신은 보지 못하겠지만, 나는 다만 손을 들었을 뿐이다.
돌아오지 않아도,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