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by 임월

한량이라도 마음이 제법 넉넉해지는, 연말 시상식의 밤. 텔레비전 불이 방을 밝히는 밤. 검은 턱시도를 입은 유승호가 무대 위에 섰다. 카메라가 그를 클로즈업할 때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트로피를 받아 든 그의 손이 떨렸다. 수상 소감을 읽는 목소리. 이십 년은 족히 연기해 온 사람의 목소리가 아직도 떨린다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된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은 붙이지 않은 채 창밖을 봤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열 살 쯤이었나. 극장에서 <집으로>를 봤다. 할머니에게 맡겨진 소년의 이야기. 나보다 어려 보이던 소년. 스크린 안에서 울고 웃고 뛰어다니던 소년. 신기했다. 같은 또래인데 저렇게 다른 세상에 사는구나.


열다섯 겨울의 노래방. 친구들이 마이크를 건넸다. 아이유 노래였다. 손을 흔들었지만 친구들은 웃으며 내 손에 쥐어주고는 했다. 첫 소절을 부르려는데 너무 떨렸다. 아무리 음정을 내려도 우스꽝스럽게 흔들리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웃음소리. 노래를 멈추고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요는 주로 혼자 듣게 되었다. 출근길 지하철, 점심시간의 벤치, 잠들기 전의 어두운 방. 이어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번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가사들을 새겨보았다.


그냥 또래 여자애가 노래하는구나 싶었다. TV에 나오는 수많은 아이돌 중 하나. 그러다 책갈피 앨범을 들었다. 무언가 달랐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그녀가 연기하는 <나의 아저씨>를 봤다. 1화를 보고선 멈추지 못했다. 한 편 한 편. 보는 동안 코로 숨을 들이쉬는 것도 잊었다. 마지막까지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보고 싶을까. 나와 같이 태어난 사람이 저런 걸 해냈다는 게.


모두 제때에 찾아 듣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신보가 나올 때마다 확인하고는 했다. 그녀의 이름이 정상에 올라가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1위를 할 때면 우리 세대 전체가 함께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런 기분.


졸업 후 몇 년을 이곳저곳 옮겨 다녔다. 정착이란 건 내게 오지 않았다. 면접장을 오가며 욱여넣은 구둣발이 시렸다. 겨울이었다. 진로상담실에서 선생님이 물었던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너는 뭘 하고 싶니? 아… 선생님, 재미없는 어른이라고 말할걸. 꿈은 반대가 된다고.


첫 월급의 알람음을 받고선, 아파트 단지 뒷문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쪽지처럼 얇은 단문의 메시지가 액정에서 구겨졌다. 그날 밤 뉴스에서 그녀가 연기자로서 신인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보았다. 분명, 나랑 같이 태어났는데.


재미없는 아저씨가 되어가며 당신들을 보았다. 드라마, 영화, 다시 보기, 유튜브에 떠도는 무대 영상들. 클립. 그가 카메라 앞에서 울 때 내 손도 주먹을 쥐었다. 그녀가 하늘에 닿을 때 나도 함께 올랐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PC방에서 영화를 보다 울었던 기억이 난다.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 배우의 얼굴이 내 얼굴과 겹쳤다가 흩어지고는 했다. 몇 시였더라, 그때가. 알바도 졸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몽롱한 시간. 그때 본 드라마에 유승호가 나왔었다. 어릴 때 봤던 그 소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저 사람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많이 넘어졌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도 그랬을 것이다. 현장의 복도에서, 사람들의 식어버린 눈빛 앞에서, 슬럼프의 한밤중 침대 위에서. 스무 살의 그도, 스물다섯의 그녀도, 모든 것이 빛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거라 생각이 든다. 내가 모를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당신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더 분명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들이 빛날수록 내 그늘도 짙어졌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 더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객석이라는 자리. 내가 서지 못한 무대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일. 부르지 못한 노래를 가장 깊이 듣는 일.



그러나 이 밤에는 노트를 펴보기로 한다. 오래 묵힌 글을 다시 익히고, 새로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주말에는 미뤄둔 책을 읽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은 언제인지 가보기로 했던 낯선 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가 연기할 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노래할 때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트랙에서 달리고 있었다. 속도는 달랐고 방향도 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다.


1993년. 서른두 살. 그들은 시상식 무대에 서고, 나는 좁은 방의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사실, 너희가 빛날 때마다

우리 세대가 함께 빛나는 것 같다고.


정말로 말해주고 싶다.

너희의 달리기가 나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창밖엔 눈이 계속 내린다. 내일은 길이 조금 미끄러울 것 같다. 12월의 마지막. 담배를 끄고 이불을 덮었다.


눈부신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서 있든, 작은 책상 불빛 아래 앉아 있든,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건, 우리 모두의 질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