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by 임월





처음 앉아본 자리였다. 늘 타던 노선이지만, 이 방향으로 이 계절에, 이 시간대에 창가를 차지한 건 처음이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칸, 같은 손잡이를 잡았다. 시간표는 나를 위해 짜인 게 아니었지만, 어느새 몸은 제대로 길들여졌다. 아침 일곱 시 사십오 분. 저녁 일곱 시 십오 분. 문이 열리면 먼저 반응하는 건 다리다. 어느 계단이 덜 막히는지도, 어느 출구에서 신호를 덜 기다릴 수 있는지도, 이미 몸은 너무도 정확히 훈련되어 있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약속이 취소되었고, 급히 나갈 일도 없었다. 다만, 오늘 개봉한 영화의 한정판 포스터를 얻기 위해 한 시간 늦은 열차에 올랐다. 사람은 여전히 많았지만 아침의 살벌함은 빠져 있었고, 빈자리 하나가 창가에 남아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앉았다.


햇빛이 강하게 들어왔고, 다리를 덮은 손이 미지근해질 정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옮겨 앉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맴돌았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게으름 탓인지, 오늘만의 기분 때문이었는지, 굳이 이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차창 밖으로 한강이 비스듬히 흘렀고, 뒤로는 잘 정리된 자전거 도로와 일정한 폭으로 심어진 나무들이 규칙적으로 미끄러졌다. 서울의 풍경 가운데서도 유독 계산된 구간, 지루한데 놓치고 싶지 않은 구간이 길게 이어졌다. 자전거 몇 대가 일정한 속도로 프레임 안팎을 지난다. 속도와 간격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열차의 흔들림도, 창틀의 진동도, 이 박자에 얹혀 있다. 움직임들이 서로를 재촉하는 대신, 서로를 흘려보내며 나아가는 느낌. 오늘은 유난히 그렇다.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니 빛이 정면으로 부딪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자 유리에 내 얼굴이 또렷하게 붙었다.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나는 가만히 멈춘 사람처럼 보였다. 어딘가 불편했으나, 불편함 때문에 오래 바라보게 되는 얼굴. 눈가의 작은 잔주름이 얕은 수로처럼 잡혀 있었고, 입꼬리도 내려가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거울을 봤을 텐데 왜 지금에서야 이런 얼굴이 되었는지 알 것 같다가,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창은 밖을 보여주기 위해 있지만, 어떤 날은 안쪽을 먼저 꺼내놓는다.


뒤늦게 손등이 덥혀진 걸 알았다. 움직이지 않은 시간만큼 따뜻해진 것들이 있었다. 열차는 속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구는 졸고, 누구는 화면을 넘기고, 저 끝 학생은 책장을 펼친 채로 넘기지 않는다. 문은 닫혀 있었고, 방송은 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 얼굴을 보다가, 다시 밖을 보다가, 사이에 있는 유리를 보았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무슨 노래인지는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되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리듬은 록이 아닌 블루스에 가깝다.


나는 한때 시간을 쫓아 적응하는, 훌륭한 어른에 가까웠다. 약속 앞에서, 출근 앞에서, 마감 앞에서, 남은 분을 셌고, 분이 모자라면 초를 셌다. 애플워치를 벗어던지고 느린 초침의 84년제 세이코를 찼을 때도, 달력을 벽장에서 꺼내지 않았을 때도, 초침 소리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갔다. 버려야 하는데 버리면 불안해지는 것들, 그 무리 속에 시간이 있었다. 다만 오늘은 초침이 아니라 햇빛이, 경고음 대신 진동이, 재촉 대신 체온이 있었다. 박자는 그대로였지만, 악기가 바뀐 듯했다.


도시는 대체로 정확하다. 정시에 열차가 들어오고, 환승 구간에 사람의 흐름이 겹치고, 신호가 바뀌고, 전광판의 숫자가 잠깐씩 줄어든다. 나는 이 정확함 안에서 늘 한 박자쯤 뒤에 서 있는 기분으로 지냈다. 사이를 메꾸려 뛰기도 했고, 때로는 포기하고 서기도 했다. 오늘은 서는 쪽으로 기운다. 뛰지 않아도 바퀴는 굴러가고, 서 있어도 차는 목적지에 닿는다. 이 단순한 사실이 단순하지 않게 와닿는 날이 있다. 아마 오늘이 그런 날이었을 것이다.


자전거 도로 위 그림자들이 바뀌었다. 구름이 해를 가리고, 나무의 가지가 프레임 가장자리를 스치고, 강 위의 반사가 한 번 더 무너졌다 붙었다. 그 변화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포스터를 말아 쥐고 귀가하던 저녁들을 떠올렸다. 도로 옆 가로수의 그림자, 발밑의 작은 돌멩이, 신호등 아래 스치는 바람, 손아귀에서 둥글게 말리는 얇은 종이의 탄성, 그런 것들이 잠깐씩 시간을 멈추게 했던 날들. 지나간 일도 아직 오지 않은 일도, 그럴 때면 잠깐 뒷전으로 밀려났다. 오늘의 멈춤도 그러한 범주의 하나였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종류의 멈춤, 설명하면 사라지는 종류의 멈춤.


유리 속의 나와 유리 밖의 풍경이 한 장면으로 포개졌다가 풀렸다. 그 사이에 내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는지, 창에 남은 얼굴이 덜 낯설어 보인다. 손등의 온도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 온도만으로 한 정거장은 더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리고 타는 사람은 없었다. 정지음이 울릴 때도 있었고, 그냥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규칙은 규칙대로 굴러갔고, 나는 이 안에서 오늘의 예외가 되는 쪽을 택한다. 선택이라 부르기엔 소심하고, 변화라 부르기엔 어쩐지 어색하지만, 어떤 날의 중심은 그렇게 작고 조용한 쪽에 놓인다.


열차는 강을 한 번 더 건넜고, 강물은 아까와 다르지 않게 흐른다. 나무는 여전히 정확한 간격을 유지했으며, 속도가 느려졌다 빨라졌다 했다. 나는 더 이상 어디로 가는 사람들의 걸음과 속도를 재지 않았고, 그들의 뒷모습을 설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등이나 어깨나 손에 든 사소한 물건들, 무심한 디테일들이 오늘의 지문처럼 느껴졌다. 나도 지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다만 조금 늦게, 조금 덜 급하게, 조금 덜 정확하려 할 뿐.


도착을 앞두고도 서두르지 않았다. 방송이 한 번 더 흘렀고, 문이 열릴 준비를 하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틈으로 들어왔다. 그때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좀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유리창에 붙어 있던 얼굴이 각도를 바꾸며 천천히 흐려졌고, 흐림이 다소 편안했다. 오늘의 목록으로 적어둘 만한 말이 있나 떠올려봤지만, 적을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편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


플랫폼으로 나와 첫 계단을 내려가다가 무언가 손등을 한 번 더 두드렸다. 창의 온도가 아직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 갈지, 얼마나 갈지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미지근함. 충분하다. 오늘은 그럴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창밖이 아닌 창에 마음이 걸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