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느리게 떨어지는 아침. 수도꼭지를 반쯤 틀자 얇은 물줄기가 세면대 벽을 따라 미끄러진다. 아직 식지 않은 잠의 체온이 남아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밤을 벗지 못한 얼굴이다. 눌린 베개의 자국과 눈가의 실핏줄이 붉게 남아 있다. 장을 열어 면도날을 꺼내면, 금속의 냉기가 피부를 타고 번지며 욕실의 온도를 낮춘다.
크림을 손바닥에 덜어 문지른다. 거품이 부풀어 오르며 공기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작게 튄다. 멘톨 향이 코끝에 달라붙고 낡은 도기의 물비린내가 섞인다. 안정적이고 익숙한 냄새. 날이 피부에 닿기 직전, 아주 짧은 망설임이 온다. 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순간의 긴장이 좋다.
면도날이 뺨을 지나갈 때 수염이 떨어지고 피부 아래에서 열이 오른다. 피가 조금 맺힌 듯하다. 로션을 바르면 알코올이 상처를 파고들고, 따가운 기운이 번진다. 어제는 멀쩡했는데 오늘은 베였다. 매일 같은 면도를 하지만 각도는 늘 다르다. 어제의 각도로는 오늘의 얼굴을 지날 수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기면도기를 썼다. 빠르고 편했지만 아무 감각도 남지 않았다. 그런 걸 오래 쓰면 재미없다. 머리를 자르다 가위가 미끄러지고,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던 시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품을 내어 면도를 한다. 물의 온도와 크림의 농도, 면도날의 무게가 하루마다 다르다. 오로지 나만이 차이를 기억한다. 날이 지나간 자리를 조심스럽게 훑으면 아직 식지 않은 온기가 남아 있다. 이 작은 불씨로 하루를 정돈한다.
면도를 하지 않은 날엔 세상이 나를 덮치는 것만 같다. 수염이 자라면 불안이 따라붙고, 날이 닿으면 다시 평온이 온다. 가위를 들고 머리에 닿는 감각이 아침의 면도날을 기억한다. 금속의 살을 스친 감각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사람의 머리칼 사이를 지날 때마다 차가운 선이 되살아난다.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겨우 중심을 찾는 나.
가끔은 화장실 불을 켜지 않은 채 면도를 한다. 창밖의 빛만으로 얼굴의 윤곽을 짚는다. 날이 어디를 지나가는지 손끝으로만 느낄 수 있고, 그럴 때 가장 믿을만한 것은 나의 온기다. 금속의 차가움 아래에 심장이 뛴다.
면도를 끝내면 세면대의 거품이 가라앉고 물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남은 물방울들이 번지다 이내 사라지고, 나는 한동안 수도를 잠그지 않는다. 흐르는 물이 고요를 만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 이 정적이 좋다.
미용실의 문을 열자. 머리칼이 흩어진 바닥 위로 볕이 내린다. 드라이어의 열기, 클리퍼의 진동, 사람의 체온. 그 모든 소리와 냄새 속에서, 볼은 여전히 오늘 아침의 신성한 의식을 기억한다. 얼굴에 남은 서늘함이 하루를 붙든다.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조금은 단정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