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뭐랄까, 비는 그치는 법을 잊은 듯하다.
오전 여섯 시. 죽은 알람 시계 대신 빗줄기가 창틀을 난타하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휴일이었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들은 제멋대로 굴절되며 기하학적인 지도를 그렸다. 선들이 교차하고, 무너지고, 다시 합쳐지는 그 무의미한 반복. 커튼 틈새로 스며든 희박한 새벽빛 속에서, 나는 기어이 그 붉은 얼룩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정확히는 보았다기보다 '호명'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녀의 체취는 여전히 방 안의 공기 층위마다 켜켜이 쌓여 있었다. 폐쇄된 역의 플랫폼에서 느껴지는 그 오래된 철길의 냄새처럼,
그녀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강박적으로 붉은색을 둘렀다. 손톱 끝의 선혈 같은 매니큐어부터 비에 젖어 번뜩이는 구두 굽까지.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었다. 내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물비린내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빨간색은 말이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장이 뛰고 있다는 증거 같거든."
목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섞여 귓가를 긁었다. 그녀가 연기처럼 증발한 지 2년. 기억은 망각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의 파편들은 지워지기는커녕 날카로운 근육을 얻었다.
그녀는 늘 온도를 지닌 존재였다. 한겨울에도 그녀의 손끝은 늘 미열을 품고 있었다. 그 뜨거움이 내게 투항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나는 언제나 풍경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회색의 인간이었다. 빛을 흡수해 버리는 검은 머리, 낡은 코트, 무색무취의 일상. 그런 내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미완성된 정물화'라고 불렀다.
그녀가 타오르는 원색의 화가였다면, 나는 그 색채가 흘러넘치지 않게 가둬두는 차가운 여백이었다.
이별을 통보하던 그날도 비가 내렸다. 그녀는 서점 앞, 잿빛 풍경 속에 홀로 붉은 우산을 펼친 채 서 있었다. 우산 살 끝에서 낙하한 빗방울이 물웅덩이에 닿을 때마다 서늘한 파문이 일었다. 그녀는 우산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왔네."
그녀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눈빛은 나를 관통하여 저 먼 허무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물었다. "괜찮은 거야?"
그녀는 대답 대신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우산을 접어버렸다. 무자비한 빗줄기가 그녀의 붉은 원피스를 잠식하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마치 축복을 받는 사제처럼 그 젖음 속에 몸을 맡겼다.
"비가 오면, 빨간색은 더 깊어질 거야."
그녀가 읊조린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는 등을 돌렸다. 빗줄기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수채화 속으로 녹아드는 물감 같았다. 아무런 설명도,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나의 세계에서 퇴장했다.
2. 그녀가 떠난 자리는 수많은 '왜'라는 질문들로 채워졌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소유가 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었으니까. 자유를 본질로 삼는 존재를 곁에 두려 했던 나의 욕망이 오히려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저 내 삶이라는 무대 위에 잠시 머물다 간 뜨거운 계절이었을 뿐이다.
흔적은 집 안 곳곳에서 지뢰처럼 터져 나왔다. 서가에 꽂힌 책 사이에 끼워진 붉은 책갈피, 침대 깊숙한 구석에서 발견된 해진 붉은 양말, 화장대 서랍 속에 굳어버린 립스틱. 나는 그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을 버리는 행위는 그녀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스스로 절단하는 형벌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남긴 파편들을 수습했다. 먼지가 쌓인 상자 하나를 가져와 그 안에 붉은 기억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붉은 것들의 저장소'. 수개월 동안 나는 그 상자를 열지 못했다. 뚜껑을 여는 순간, 가둬두었던 그녀의 체온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나의 일상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기에.
계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첫 비가 내리던 날, 나는 비로소 금기의 뚜껑을 열었다. 박제된 물건들 사이, 낯선 종이 한 장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를 찾지 마세요. 창(窓)은 내가 아닌, 당신이 보지 못한 당신 너머의 곳을 비춥니다."
그녀의 글씨였다. 나는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이 돋보기가 되어 바깥세상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 왜곡된 시야 사이로, 무언가 이질적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 멀리 가로등 아래, 빗줄기를 뚫고 붉은 형체가 일렁였다. 붉은 원피스, 그리고 붉은 우산.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나는 창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물음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빗물에 섞여 들어갔다. 그녀는 우산을 낮게 기울인 채 서 있었다. 내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 닿은 순간, 그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빗줄기의 커튼 너머로 비친 그녀의 얼굴, 그리고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
나는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차가운 빗물이 순식간에 옷감을 적시고 피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신기루처럼 증발해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에는 오직 한 송이의 붉은 장미만이 버려져 있었다. 짓눌린 꽃잎에서 흘러나온 붉은 즙이 빗물과 섞여 기괴하게 번져 나갔다. 마치 그녀의 육신이 빗물에 녹아내려 땅으로 스며든 것처럼.
3.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의 세계는 창가라는 좁은 좌표로 수렴되었다. 한 해가 지나고, 다시 또 한 해의 시간이 퇴적되어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밤의 심연 속에서 꾸는 꿈마다 그녀는 붉은 드레스의 자락으로 어둠을 가르며 나타났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행복해."
꿈속의 목소리는 매번 다른 파동으로 나를 흔들었다.
시간은 만성적인 통증을 무뎌진 흉터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침대 밑 상자를 다시 꺼냈다. 붉은 책갈피는 내가 가장 아끼는 시집의 갈피 속에 영면시켰고, 양말은 누군가의 온기가 될 수 있도록 기부했다. 다만, 붉은 립스틱만은 끝내 처분하지 못했다. 가끔 뚜껑을 열어 그 향을 맡을 때면, 2년 전 서점 앞의 그 어떤 공기가 바로 코끝까지 배달되곤 했으므로.
세 번째 해의 봄비가 대지를 적시던 오후였다. 우체통 뚜껑이 닫히며 내는 작은 비명 소리에 계단을 내려갔다. 우체통 안에는 심장을 닮은 선명한 붉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발신인도, 주소도 없는 익명의 전령. 나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찢자, 그 안에서 한 장의 인화 사진이 떨어졌다.
그녀였다. 타오르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이 펼쳐진 해변에 서 있는 그녀. 사진 뒷면에는 불과 일주일 전의 날짜가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적힌 단 한 줄의 문장.
"당신의 비, 나의 붉은색(Your rain, My red)."
나는 사진을 들고 창가로 돌아왔다. 사진 속의 그녀는 내가 알던 그 어떤 순간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공유했던 그 색채가 여전히 유전되고 있음을 통보했을 뿐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린다. 유리에 이마를 기댄 채 빗방울을 응시한다. 창밖을 보라던 그녀의 말뜻은 여전히 미완의 수수께끼로 남았다. 창은 그녀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었으며, 그녀 없는 세계를 견뎌야 하는 나를 가두는 벽도 아니었다.
사진 속 해변의 모래알처럼, 내 안의 회색은 조금씩 붉은 입자들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창을 열지 않는다. 빗물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환영을 쫓지도 않는다. 대신 손가락 끝으로 사진 속 수평선을 가만히 쓸어볼 뿐이다.
유리창 너머, 잿빛 하늘 어디선가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비가 그치면 나타날 그 수많은 무지개색들을 나는 아직 상상할 수 없다. 다만 빗방울이 그려내는 굴절된 지도 위로, 내 지갑 속 낡은 편지지가 붉게 젖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다.
빗소리가 잦아든다. 적막이 방 안을 채운다.
창틀에 맺힌 마지막 빗방울이 바닥으로 낙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