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거대한 인후다. 축축한 공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어딘지 깊숙한 곳에 진흙처럼 가라앉는다.
보도블록 틈새마다 무심한 시선들이 이끼처럼 끼어 있고, 맨홀에서 뿜어 나오는 증기는 낡은 외투처럼 몸을 휘감으며 질척인다. 보폭을 누르는 실체 없는 무게에 몸이 조금씩 마모된다는 기분은 이제 일상에 가깝다. 출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회색 매연이 미세한 각질로 내려앉는 동안 숨 쉬는 법을 가늠하며 소음의 벽 속에 갇힌 벌레처럼, 혹은 거센 물살에 휩쓸린 나무 조각처럼 하루를 버텨낸다. 경적과 드릴 소리가 장막이 되어 몸을 유폐하는 동안, 상경의 첫 기억이었던 산소의 냄새는 검게 그을린 폐허가 되었다.
이곳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시는 대체 가능한 수치와 마모된 톱니바퀴들로 정교하게 직조된 거대한 기계다. 거울 속의 얼굴은 초점을 잃고 서서히 투명해진다. 흉곽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 얕은 호흡. 부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증명받는다. 사람이 없어도, 혹은 다른 누군가로 갈아 끼워져도 매끄럽게 돌아가는 시스템의 효율을 목도할 때면 입안에 쓴 침이 고인다. 그것은 비릿한 냉소이기도 하고, 견고한 체념이기도 하다.
그럴 때 파랑이 당도한다. 색채라기보다 선명한 촉각에 가까운 무엇이다. 다락방 틈새로 쏟아지던 하늘의 파편, 첫사랑의 뒷모습에 매달려 있던 굴절된 여름 햇살. 예고 없이 도착했다가 흔적 없이 휘발되는 비릿한 농담 같은 것들이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냉기 속에서 비로소 단백질 덩어리 이상의 생을 실감한다. 지금 파랑은 소멸했다. 아파트는 잠시 몸을 눕히는 짐 보관소에 불과하고, 냉장고 속의 식은 맥주와 읽다 만 책더미만이 주인을 잃은 유품처럼 놓여 있다.
오전 열한 시의 미용실은 수족관처럼 깊은 정적에 잠긴다. 손님의 머리카락을 솎아낼 때마다 가위는 규칙적인 금속음을 낸다. 사각, 사각. 무언가를 창조하는 소리가 아니라, 불필요하게 자라난 생의 잔해를 덜어내는 소리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은 바닥에 쌓이며 맥락 없는 지형도를 그린다. 누군가의 삼 개월, 혹은 반년의 시간이 검은 무덤이 되어 흩어진다. 가위를 쥔 손끝에 남는 모발의 미지근한 잔열. 살아있다는 유일하고도 비루한 얼룩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오염되는 과정이며, 이 얼룩이야말로 이 지루한 시간을 견뎌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상처는 어느새 미움이 되었다. 처음엔 울었고, 다음엔 화를 냈으나, 결국 무감각의 심해로 가라앉았다. 증오의 동력으로 침대에서 일어났고 면도를 했으며 다시 가위를 들었다. 미움은 몸을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지탱하는 기묘한 균형추였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생을 유지한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완벽하게 조율된 레코드판이 회전하듯, 매일 같은 궤도를 돌았다.
어느 저녁, 그 궤도를 이탈했다. 버스 대신 무작정 걷기를 택했다. 이십 년을 살았어도 밟지 않은 길 위로 구두 굽이 생소한 박자를 새겼다. 심박 수가 보폭을 앞지르기 시작했을 때, 달렸다. 셔츠 차림으로 도심을 질주하는 일은 꽤 우스꽝스러웠으나 상관없었다. 누군가를 쫓거나, 혹은 자신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땀방울이 눈을 찔렀고, 아스팔트를 때리는 타격음만이 세계의 유일한 진동으로 남았다. 이름, 직업, 주소 같은 것들이 속도에 밀려 뒤로 탈락했다.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찰나, 파랑의 옷자락을 스쳤다.
달리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 도심의 소음 너머로 별이 보였다. 익숙함의 껍질을 깨야만 허락되는 광경이었다. 멀리서 본 도시는 짓누르는 괴물이 아니었다. 정교한 질서를 가진 조감도 속의 점들에 불과했다. 괴로움은 도시가 아니라,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던 옹졸한 시선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차가운 공기와 함께 삼켰다. 파랑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땀방울 속에, 거친 호흡 사이에,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삶의 얼룩 속에 늘 고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글프지 않았다. 냉장고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안의 파랑이 조금 더 깊게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일도 같은 길을 걷고, 정해진 머리카락을 자를 것이다. 타인의 죽은 세포들이 바닥에 검게 쌓여갈 때마다, 가위 끝에 묻은 청색 얼룩을 응시할 작정이다.
다시 가보자.
파랑은 나를 떠난 적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