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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Aug 07. 2020

침잠, '기꺼이' 가라앉음

한정원 <시와 산책>


삶의 마디마다 기꺼이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선택이 필요하다면, 여기에서 방점은 ‘기꺼이’라는 말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기꺼이 떨어지고 기꺼이 태어날 것. 무게에 지지 않은 채 깊이를 획득하는 일은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지 않을까.



- 한정원 <시와 산책>



나는 이 문장이 이 책의 정수라고 말하고 싶다. ‘기꺼이’라는 단어의 신중함과 진중함을 아는 이의 글이다. 가라앉는 것이 두려워 두 손, 두 손가락 끝까지 힘을 주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려 본다.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리기도 힘들다.



몇 년을 그리 지내고 있다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날들이 오고 나서야 힘을 빼본다. 아주 조심히, 두려워하면서도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면서.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여 ‘힘 빼기’의 시간들을 앞당긴다. ‘기꺼이’ 아주 깊이 내려가게 된다고 해도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을 거다.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내려가서 앞도 보이지 않을 밑의 세계와 아래에서 보이는 위의 찬란함을 만나고 싶다. 두려움을 걷어내고 난 후에야 보게 될 세계다.



침잠은 표면적인 것과 멀어지므로 필연적으로 깊이를 얻는다(그것이 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무게도 얻는다. 내가 무게를 느낄 때를 곰곰이 따져 보면, 거기에는 늘 지나친 자애와 자만이 숨어 있었다. 나를 크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우울해지는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나의 느낌이나 존재를 스스로 부풀리고 싶어 하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 한정원 <시와 산책>



윗글의 바로 앞의 문장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읽는다. 무게와 깊이, ‘기꺼이’라는 단어의 상관관계를 따져본다. 하지만 그것보다 나의 시선을 더해서 받아들인다. 나의 내면의 무게를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침잠’이라는 단어를 오래전에 들었다. 드러내려 애쓰지 말고, 일단은 자신의 안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무게에 가라앉아버리는 것마저 받아들이는 상태인 거다. 내가 그 당시 받아들이고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드는 단어를 향한 감정은 그렇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무게’와 ‘깊이’를 온전히 받아들일 정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감정 또한 그 단어라 생각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 거다. 그 오만한 감정을 똑바로 바라본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직도 멀었다. 그 순간이 오기나 할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오지 않으면 또 어떤가 싶다.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점점 무게가 더해지고 흘러넘칠 만큼 채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공부’라고 부르는 지금의 행위들이 향하는 것이 바로 그 ‘침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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