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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Sep 07. 2020

그녀의 여행에 무임승차.

하정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


어떤 사람이 요령을 피우고 예외적인 혜택을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훌륭한 사람(Wonderful person)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따지고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품위 있는 행동이 아니며, 또한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않는다.


: 스반홀름 홈페이지, 공동체 소개 중에서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 한참을 멈추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었고, 서로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밤늦게까지 잠들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덧 서로의 세상을 부정하고 조롱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달라고 했다. 어떻게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더 이상 훌륭한 사람(Wonderful person)이 아니게 되었을까. 우리는 애초에 Wonderful person이 아니었다. 서로를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가 일순간에 비겁하고 뻔뻔한 사람으로 끌어내렸다. 연애는 오만하고 이별은 치사했다. 얄밉고 이기적인 사람을, 여전히 Wonderful person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다른 서술은 다 잊어버린 채 이 문단만을 마음에 담고 스반 홀름으로 향했다.



- 하정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 13p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의 저자 하정 작가는 씩씩하게 스반 홀름 공동체로 떠났다. 그녀의 이 두꺼운 책 말미가 되어서야 이 여행의 끝에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의 주인공을 만나게 됨을 깨닫는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그 이후의 이야기가 아닌 그 이전의 이야기로 역주행하는 책이다.



스반 홀름, 1970년대에 설립된 덴마크의 생활공동체란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렇게나 많다. 공동체는 사회주의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사회주의는 여전히 쉽게 몸도 마음도 이완할 수 없게 하는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익숙한 사회이자 세계다. 자본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되지 않는 삶. 함께 책임지는 연대. 막연히 아는 것으로 생각을 열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극으로 치닫는 양날의 검처럼 느껴지니깐 말이다. 좁혀질 수 없는 생각들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쉽게 넘기지 못하고 공동체 소개글을 여러 번 읽어 본다. 



하정, Summer라는 애칭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계속 불러본다. 싱그러운 여름을, 웃음 짓는 그녀를 그려보기에 너무 적당한 이름이 아닌가. 그녀가 첫 북유럽 여행을 떠난다. 미리 길들을 알아두고 버스를 탈 때의 주의사항도 생각해두는 그녀다. 버스기사에게 미리 종이에 적은 정거장 이름을 펼쳐 보이고 앉지만 버스 안 모니터에 정거장의 이름이 나타난다. 북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며 감탄이 흘러나왔단다. 솔직한 모습에 웃음이 난다. 어느새 나는 그녀와 함께 버스에 오르고, 본 적 없는 모니터, 버스기사의 너그러운 표정,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상상한다. 그녀가 도착한 공동체는 또 얼마나 편안함을 안겨주는지, 사진으로 남겨 둔 반지하 방은 어쩜 이리도 로맨틱하단 말인가. 처음의 상상 못하던 그녀의 여행길에 이제는 기꺼이 무임승차를 시도한다.



"그에 반해 오늘 스반 홀름 동료들과의 만남은 아무 맛없는 시골빵 한 덩어리를 뚝뚝 떼어 나눠 먹는 아침밥 같았다. 자극도 호들갑도 없는 대화. 누구도 누구에게 기대를 걸거나 기대를 심지 않는, 바라는 것이 없는 사이의 대화. 잘해 보이겠다는 의지를 약속할 필요가 없는 대화. 아, 담백해. 있는 그대로를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깨끗한 한 끼 식사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먹지 않았는데도 충분히 배가 불렀다. 상대에게 눈길을 주다가, 자기 일에 집중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마치 철새들의 움직임 같았다. 그래, 이대로 북쪽 끝까지 같이 가보는 거다."

-하정 <나의 두려움을 여기 두고 간다> 25p



그녀의 첫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함께 일을 하거나 식사를 하게 될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인데, 이런 첫 만남이라니.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긴장감이 약간의 시간 동안 지속되곤 한다. 어색함에 서로의 눈을 편히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분위기를 살피는 숨 막히는 고요함. 내가 늘 생각하는 많은 모임의 첫 만남의 모습이다. 그 순간의 정적을 깨고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했던 나로서는 첫 만남의 날은 늘 떨리고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런 첫 만남이라니, 정말 그녀의 말대로 너무 담백하다.  이 첫 만남 이후 마음을 푹 놓고 그녀를 따라간다. 누군가의 삶 깊숙이 들어가고자 하는 감정이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 정도에 따라 상처받기도 하고 원치 않는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곤 속앓이 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담백한 첫 만남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Summer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그들 역시 낯선 한국인 Summer를 바라보며 서로의 다른 점에 통쾌하게 웃기도 하고 물들어가기도 한다. 선크림과 모자로 무장하고 햇빛으로 나가는 그녀와 달리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모른 채 햇빛에 그대로 몸을 맡긴다.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Summer를 신기한 듯이, 하지만 마음에 애정을 심어둔 채 바라보며 언제나 활짝 웃는 그들이다. 우리와 너무 다른 삶을 사는 그들에겐 또 다른 삶을 지내기 위해 온 Summer의 모습이 낯설었을거다. 어쩌면 Summer의 행동들이 귀엽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마지막 돌아오기 전 Summer는 그들과의 지내온 시간들을 사진으로 뽑아 숙소의 흰 벽에 붙여 작은 사진전을 펼쳐 둔다.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사진을 이메일로 돌아오는 길에 받으며 사진은 알아서 떼어 주어도 좋다며 답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진을 철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답장을 보내왔고, 다음 해 Summer의 사진전 뒤로 남겨진 이들이 찍은 사진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Summer는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고, 나 역시 갑작스러운 감동을 받은 여자처럼 울컥, 목이 막혀왔다. (정말 함께 떠났고 웃고, 하늘을 바라본 여행이었다는 증거)



그리고 이 여행을 마치는 길에서 Summer는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로 이어지게 될 인연인 쥴리와 쥴리앙을 만난다.

그녀와 그를 뒤에서 찍은 선상에서의 사진은 다시 만나니 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Summer의 30분 약속의 스반 홀름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Summer와 여행을 하며 마음이 젖었으니 충분히 괜찮았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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