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주 Nov 03. 2020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파트리크 쥐스킨트 - 좀머씨 이야기

s에게


오늘은 꽤 차가운 온도를 느끼면서 옷깃을 여미고 너는 네 손을 내 옷 주머니에 넣었지. 내 옷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마다 너는 그렇게나 나를 웃으며 바라보고 너무 좋아 하는구나.


혼자 책상에 앉고 나서야 네게 이야기를 들려 줄 책 표지의 그림을 바라본다. 구부려진 지팡이를 (이 지팡이는 사실 별로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다.) 손에 들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이야. 조금 오래된 기억 속에 있던 그림과 여전히 같은 느낌으로 다시 만나는 그림은 이 책을 향해 반가움도 섞여 들게 해.


이 책에는 한 아이가 나온단다. 자신이 너무 가벼워서 날 수도 있을거라는 아이의 이야기와 들판을 뛰어 내려가며 팔을 한껏 벌리고 바람을 맞는 아이의 그림은 이미 너를 이 책으로 행복하게 불러들일 것 같구나. 그리고 이 아이가 <좀머 씨>라고 불리던 한 남자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해.


아직 나무 타기를 퍽 좋아하던 시절, 우리 동네인 호수 아랫마을이 아닌 다른 미웃 마을 그러니까 호수 윗마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살기는 우리 마을에서 살았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호수 윗마을과 아랫마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마을 간 경계가 분명하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호수를 따라 한쪽에서 반대편 호숫가 쪽으로 뚜렷한 시작도 끝도 없이 정원과 집과 마당과 배들로 엮어진 가느다란 끈이 이어져 있는 형태였다... 어쨌든 그런 동네에서 우리 집과 불과 2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좀머 씨>라고 부르던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좀머 아저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마을에 사는 이도 아닌 다른 마을에 사는 이를 이야기하고 있단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에게 관심을 보이긴 하지만 정확한 이름도 모른다는 구나. 모두 좀머 아저씨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안다는 것이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그저 어디에서든 좀머 아저씨가 보였고 매일 걸어다녔던 모습을 마을 사람들은 다들 바라봤으니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어.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


‘나’는 그저 한 아이의 일상을 그리고, 짝사랑을 했던 이야기며 피아노 선생님께 혼이 났던 이야기며, 자전거를 탔던 이야기들을 하지. 하지만 그 틈에 늘 좀머 아저씨도 함께 존재했어. 물론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새 곁을 혹은 저 멀리 지나가는 사람으로 말이지.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단다. 추운 겨울 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앞도 잘 보이지 않을 때 아이의 가족은 차를 타고 겨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어. 바로 그 옆으로 좀머 아저씨가 지나가고 있었지. ‘나’의 아버지는 호의를 베풀기 위해 차의 창문을 내리고 얼른 차에 타라고 했지. 한참을 설득했는데 좀머 아저씨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니?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돠두시오!”


세상에. 그리고 이어지는 글은,


그 말뿐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까지 열린 채로 있던 차의 앞문을 닫고, 지팡이를 다시 오른쪽으로 바꿔 쥐고는 눈길을 옆으로 주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우리 차가 그를 앞질렀을 때 나는 뒤 유리창을 통해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다. 시선은 땅 쪽을 향한 채 몇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마다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을 치켜세웠고, 뭔가 두려움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눈을 크게 뜨고서 잠깐씩 앞쪽을 쳐다보곤 했다. 빗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콧잔등과 턱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어쩌면 걸어가면서 뭔가 혼잣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좀머 아저씨는 왜 그랬을까? 그런데 사실 조금은 통쾌한 기분도 드는구나. 어린 시절보다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쩜 그렇게나 사람들의 시선과 말들에 얽매이게 되는지 몰라. 가끔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하루라도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가끔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더 자주 말이야. 나의 행동이나 말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아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자주 할 거야. 그래서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는 말에 뭔가 모를 통쾌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거야.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 다 보낸 사람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밝혀지고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지. 하지만 그 위에 다시 또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말을 나누어. 어떤 사람이었을 거라는 아무런 근거 없는 추측들을 내 보이지. 그는 죽어서도 다시 말하지 않았을까?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이야.


사실 이 책을 지은 작가는 <향수>라는 유명한 작품을 세상에 내 보이곤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고 있단다. 그는 평소에도 유행에 뒤처지는 스웨터를 입고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채 걷는다고 하는 구나. 다른 이들과 말을 많이 섞지도 않고 늘 창문을 닫고 사는 철저한 은둔 생활을 한다고 해. 그는 <좀머씨 이야기>에서 좀머씨처럼 말하고 싶었을 거야.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라고.


나는 늘 네가 이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잘 어울려 지내길 바라곤 해. 아주 평범하게 하지만 지혜롭게 말이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너를 잠시 쉬게 해 주는 시간도 꼭 가졌으면 좋겠 생구나. 완전히는 아니어도 너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온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단다.

작가의 이전글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소설을 읽는 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