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아자르 / 책.어린이.어른
나는 또 어린이들이 즐겨 머릿속에 그리는 것을 그대로 담은 책을 사랑한다. 온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특히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선택된 것, 어린이들을 해방시키고 기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이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들한테 덤벼들어 그들을 현실 세계의 굴레로 얽매어 버리지 못하도록 지켜 주는 신비의 세계, 그런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는 책을 나는 사랑한다.
어린이들에게 감상이 아니라 감수성을 자각시켜 주는 책, 인간다운 고귀한 감정을 어린이들의 마음에 불어넣는 책, 동식물의 생명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생명을 모두 중시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책, 천지의 만물과 그 만물의 영장인 인간 속에 있는 신비스러운 것을 헛되이 하거나 소홀히 하는 마음을 결코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지 않는 책, 그런 책을 나는 사랑한다.
폴 아자르 <책.어린이.어른> 60p
오랜만에 어린이 문학 이론서를 펼쳤다. 폴 아자르의 <책.어린이.어른>은 양질의 책만을 선별하여 번역하며 국내에 소개해 온 햇살과 나무꾼 편집팀의 번역서다. 사실 이것을 모를 때는 도대체 햇살과 나무꾼이 누구냐며, 누가 이런 필명을 쓰며 번역을 하는거냐는 우스운 호기심도 가졌다. 처음 만난 책이 <옛 이야기의 매력 1,2> 였고, 플래그가 부족할 정도로 나를 어린이 동화의 매력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햇살과 나무꾼에서 펴낸 이론서들과 동화책들은 믿고 읽는 책들로 인정하였다.
<책.어린이.어른>은 1장,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보호받지 못했던 시간들에도 끊임없이 그들은 '날개'로 인식되는 '그들만의 책', '이야기'를 염원해왔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안겨 주지 못하였다. 이런 어른들을 철저히 비판하고 위트있게 비꼬았다. 존 뉴베리의 서점이 시작된 이야기도 물론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는데 서점에 놓여진 그 당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흥미롭게 독자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2장 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린이 책에 대한 폴 아자르의 더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돈 키호테>의 이야기와 함께 아이들이 어른을 위해 나온 책을 스스로 어린이에게 오게 만든 이야기를 전한다. 비록 그 내용이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님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린이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할 것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어린이는 그들에게 필요했을 이야기들을 '지켜냈다'는 것에 응원을 보내는 어른의 입장을 전하는 느낌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 치명타를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저건 우리 거야, 저건 우리 거야." 하면서 바로 이 책을 가리킨다. 어른들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미는 달콤한 책은 어린이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쓰디쓴 음식으로 보이는 것을 어린이들은 자기 것으로 여긴다.
-위의 책 87p
원작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절대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 마치 점쟁이가 지하의 물줄기를 감지해 내는 것처럼 어린이들은 원작의 급소만은 확실히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환상의 샘이 원작 어디에서나 용솟음쳐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이 놀랄 만큼 풍부하고 균일하게 원작의 저변을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환상은 기발하고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완전한 논리가 떠받치고 있어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어떻게든 진실에 가까워진다.
-위의 책 88p
우리가 늘 이야기해오던 '원작', 완역본의 중요함을 폴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아주 깔끔하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이는 그 동화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될 길을 찾아낸다.
이 책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프랑스가 자국인 본인의 입장에서도 전혀 프랑스를 옹호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남쪽 나라와 북쪽 나라로 구분지으며, 영국인들의 어린이들과 어린이 책을 향한 시선에는 그것이 옳다고 적극 지지하였다. 반면 프랑스의 모습에서는 적극적으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비판하였다. '민족적인 특색'이라는 제목의 4장에서는 이탈이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모든 나라들(물론 동양은 포함되지 않았지만)로 구분을 두어 그 나라 고유의 민족적 특징들 때문에 생겨난 어린이를 향한 시선과 책들의 차이들을 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이가 바라는 이야기들과 영웅 이야기들을 남기며 긴 서사는 끝을 낸다. 폴 아자르는, 아주 철저하게 객관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어린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에게는, 따끔한 지침서로 존재할 책이다.
한 번의 완독으로 두기에 아쉬워 또 읽어보고 생각날때마다 이곳 저곳을 펼쳐보게 될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동화의 왕, 안데르센(본 책에 실린 제목이 "동화의 왕, 안데르센"이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모든 글을 다 줄 긋고 싶을 만큼 좋았었고 아껴둔 안데르센 동화집을 펼쳐볼 때가 되었나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