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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Nov 12. 2020

어떤 상황에서도 문학은.

다이 시지에 -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나는 즉시 바이올린으로 그 노래를 반주해주었다. 그건 마오 주석의 영광을 예찬하기 위해서 중국인들이 가사를 바꿔서 부르던 티베트 노래였다. 그런데도 그 곡에는 삶의 기쁨, 불굴의 힘이 담겨 있었다. 바이올린 반주가 그 노래를 완전히 망치지는 않았다. 점점 더 흥이 난 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틈 벌어진 기와를 통해서 집 안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28-29p







문화 대혁명 시기를 지나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소위 브루주아에 속하는 지식 계급의 아들들이었고 순식간에 반역자로 몰린 부모님들을 뒤로 하고 재교육을 받기 위한 명목으로 시골로 보내진다. 바이올린을 처음 본 주민들에게 곡을 연주하고, 비가 새는 남루한 집에서 겨우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그 시간을 버틴다. 탄광에서 죽을 거라며 비관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살아갈 방도를 어떻게든 찾아내고 행동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을 내는 거였다.




그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영화를 보고 와 연극의 형태로 사람들 앞에 서서 공연아닌 공연을 해내기도 한다. 그들이 또 다른 친구였던 '안경잡이'를 만나러 가던 날에 그려진 '안경잡이'의 일하는 모습이나 그가 숨겼던 책들이 든 가방을 찾아내는 모습들이 여전히 머릿속에 반복하여 이어진다.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만나고 '뤄'와 둘은 그 험난한 시절에도 '사랑'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 소년들이 '안경잡이'에게 빌려받은 '발자크'의 책을 만난 모습이 그려지는 부분은 내가 만난 이 책의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바-엘-찌-게'. 중국어로 번역된 프랑스 작가의 이름이 네 개의 표의문자로 하나의 낱말을 이루었다. 번역의 경이로움인가! 갑자기, 앞의 두 음절이 주는 무거움,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호전적이고 도전적인 울림이 사라졌다. 각각이 약간의 의미를 내포한 아주 멋스러운 네 글자가 한데 모여 에사롭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아내면서 몇백 년 동안 지하실에 보존된 술에서 나는 향기처럼 이국적이고 감각적이고 그윽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79p 




완벽하게 매료당한 모습이었다. 영어도 프랑스어도 아닌, 중국어로 번역되어서 읽으면 이미 그 사람이 누군가 싶을 정도로 낯선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이름 앞에서도 그들은 반해버렸고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그 책 자체도 그들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뤄는 '안경잡이'가 책을 준 그날 밤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해서 새벽녘까지 모두 읽어치웠다. 책을 다 읽은 그는 남폿불을 끄고는 나를 깨워 책을 내밀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밤이 이슥하도록 사랑과 기적으로 가득한 프랑스 이야기에 푹 빠져,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보냈다.


아직 청춘의 혼돈상태에 빠져 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80p




주인공인 '나'는 종이도 없었으니, 그나마 옮겨 적을 수 있는 양가죽쟈켓의 안에 소설의 한 부분을 옮겨 적는다. 어떤 상황도, 절박함과 불굴의 의지를 이기는 것은 없다. 뤄는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에게 발자크의 글을 외워서, 혹은 읽어며면서 그녀를 깨우려 한다. 미지의 세계에서 '생각하고 질문'하게 하려 한다. 




언제인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을 때의 적잖은 충격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영화로 옮긴 <허삼관>은 조금 더 가족애에 중심을 다루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을 때의 그 환경을 그린 필체나 생각들, 사람들의 행동들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순간이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오른 건 자연스러운 것이었일지도 모른다.





"아직 청춘의 혼돈 상태에 빠져있는 열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갑자기 그 작은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 다이 시지에





실제로 작가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기에 소설이지만 오히려 그 시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픽션의 부분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발자크의 소설, 여러 서양 문학을 접한 이들의 세계는 이미 그것을 모르던 시간들의 그들을 잊게 하였다. 






중국 소설, 글들을 쉽게 접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들이 내가 향하는 곳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많은 중국 소설을 읽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의 편견은 걷히게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읽던 와중에 남겨 둔 이야기들.


https://blog.naver.com/daon_elly/22213938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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