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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Dec 12. 2020

눈의 나라.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7p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너무나 인상적으로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다른 분야들에 비해 소설의 첫 문장은 유독 그 글을 읽어가는 내 마음까지 이미 결정해버리기도 한다. 완전히 매료되거나 완전히 뒤돌아서거나.


일본이라는 나라는 많은 이들이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알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일거라 생각한다. 내가 그들의 문화를 '정적'이라고 말하는 것또한 편견에 사로잡힌 나의 그들에 대한 인상인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분명, 이 소설에서는 '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모은 것 같았다. 


도쿄에 사는 시마무라는 겨울 즈음이 올 때마다 '설국'. 눈의 고장으로 짧은 여행을 온다. 그 곳으로 가는 기차안에서의 풍경으로 이야기는 시작하지만 이야기에 어떤 '서사'나 긴장감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설국 자체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과, 미묘하게 흔들리는 게이샤의 모습을 그려낸다. 묘사가 많기에 특정한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이 책을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창틀 안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에서 커다란 함박눈이 흐릿하게 이쪽으로 떠내려 온다. 어쩐지 고요하고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시마무라는 잠이 덜 깬 허전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타이 모임 사람들의 북소리가 들렸다. 시마무라는 작년 세밑의 그 아침, 눈이 비치던 거울을 떠올리며 경대 쪽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 고마코의 살결은 금방 헹궈낸 듯 깨끗해서 시마무라가 어쩌다 내뱉은 말 한마디조차 그런 식으로 오해할 여자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데에, 오히려 거역하기 힘든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 적갈색 단풍이 날마다 짙어지는 먼산은 첫눈으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엷게 눈을 인 삼나무숲은, 삼나무 하나하나가 또렷이 드러나, 찌를 듯 하늘을 향한 채 눈 위에 서 있었다.

위의 책 129p


설국을 읽는 내내 사실은 머리가 어지러져 오는 느낌이 들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정서를 알지 못하면 이 책도 소화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을거다. 겨울 풍경을 표현하는 문장에서는 마음이 한없이 아득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 전, 연말에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여행 내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용한 시골길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풍경이 있다. 유후인의 료칸에서 떠날 때 눈이 날리기 시작했었고, 차를 타고 뒤를 돌아볼 때 한없이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눈 속의 그들이었다. 눈은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고 함박눈이 되어 펑펑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눈 속의 풍경이 된 것처럼 우리가 사라질때까지 서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을 자꾸 떠올렸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눈이 오면, 료칸에서 떠나올 때 만났던 모습과 함께 시마무라가 떠나서 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 고마코가 창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방 안으로 들어오게 하던 것을 바라보는 모습이 내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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