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잉타이 / 안드레아 <사랑하는 안드레아>
안드레아, 사과하지 않아도 돼. 엄마가 너의 중요한 일부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아. 그런 순간은 일찌감치 지나갔지. 스무 살에게 부모는 낡은 집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어. 네가 사는 그 집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온기와 편의를 제공하지만 집은 집일뿐이야. 집과 소통하고, 집에게 말을 걸고, 다정하게 굴거나 집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잖아. 가구를 옮기다 부딪혀 벽 한쪽을 망가뜨려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지. 부모란 말이야, 건넛산 돌 쳐다보듯 하는, 익숙해져 버린 낡은 집 같아.
룽잉타이 <사랑하는 안드레아> 133p
실은 모두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엄마도 알다시피 '평온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일들은 대개 작고 사소한 것들이잖아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예요. 이따금, 안 그래도 유독 짜증이 나거나 하는 날 하필 유리병을 깨뜨린다거나 옷에 우유를 엎지른다거나 하면 그날은 진짜 재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잖아요. / 제 '하소연들'이 어쩌면 돈 많고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생활이 비참하다며 투덜대는 것과 비슷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운명은 종종 너무 하찮아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일들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하잖아요.
안드레아 <사랑하는 안드레아> 85p / 89p
엄마의 키를 훌쩍 넘긴 장성한 아들과 꾸미지 않은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한 갈래로 묶었지만 단호해 보이는 입매의 세상을 예민하게 지켜보는 엄마의 사진이 표지를 채우고 있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의 이름에 엄마인 룽잉타이는 한자어가, 아들인 안드레아는 독일어가 함께 이름 옆에 표기되어 있다. 한 사람은 대만에서, 그리고 한 사람은 독일에서 생애의 많은 순간을 지내는 것을 이름에서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떠나왔던 시간 동안 아들은 '고요하고 깊은 눈빛에 거리를 두려는 의지'를 가진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자연스럽게 안드레아는 엄마에게서 물러나려 했고 룽잉타이는 그런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의 모든 것을 알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제 엄마로써 아들의 많은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게 했다.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열여덟 살의 이 사람을 알아야 한다.'라고. 자식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다며 '나는 너를 잘 알아.'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편지를 나누는 칼럼을 써보자며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고, 안드레아는 아주 흔쾌히 동의했다. 안드레아는 독일어, 룽잉타이는 중국어로 쓸 때 가장 편함을 느끼지만 한 발씩 물러나 영어로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메신저를 통해 누군가는 밤늦게 누군가는 새벽에도 대화 나누기를 피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 사람을 알려면, 처음부터 배워야 하고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편지와 대화들은 3년 동안 이어졌다. 그 사이에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들까지 이 책에는 그들의 편지, 대화 내용은 물론 그들이 받은 독자들로부터의 편지들이 함께 담겨 있다.
그저 엄마가 아들에게, 아들이 엄마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에만 지나지 않는다. 아들이 엄마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을 그 시간의 틈에 가져온 아들의 생각과, 그걸 바라보는 엄마의 지혜롭게 내밀고 싶은 조언들이 담겨 있다. 엄마가 살아온 시대의 문화와 아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문화는 너무나 다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누려온 문화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독자들의 편지 역시 아주 예리하게 느껴졌다. 독자들 역시 자신의 문화만을 감싸는 감성적인 편지가 아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화의 원인을 바라보려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부녀로부터의 영향으로 자신들 역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감격스러움을 담은 감사의 편지도 함께 있다.
아들이 말하는 교육, 키치, 문화, 사랑, 성, 여가, 걱정들에 엄마는 최선을 다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마음을 내보이며 조언을 해주려 노력한다. 물론 때로는 조언 대신 또 다른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아들은 패기 넘치는 대답들을 하기도 하지만 그 대답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확실히 이야기를 다시 건네는 엄마로서의 룽잉타이는 정말 지혜롭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건네도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이 긴 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그들의 티격태격하는 모습마저 너무나 애정 가득하게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야, 천천히 오렴>에서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작은 존재였던 아이를 향한 자신의 엄마로서의 마음이 표현하였다면 <사랑하는 안드레아>는 두 세대의 대화로 그들의 마음을 표현했다.
조금은 민감해질 수 있을 정치와 역사 이야기도 있지만, 내내 피하고 싶은 그 이야기들은 어쩌면 자신이 발을 딛고 선 땅에 대해 알아가야 할 예의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거다. 피하지 않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대화를 바라본 후 아이의 '학습'을 위해서가 아닌 아이와의 '대화'를 위해, '지혜로운 대화'를 위해 내가 어떤 것들을 바라보며 책을 찾아 읽고 정보들을 모아 나가고 기록해가야 할지 가장 진중하게 깨닫게 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