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채링크로스 84번가>의 표지에 있는 작은 가게 모습을 아주 자주 들여다보곤 했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헬렌 한프의 책을 구하는 편지로 시작해 그와 프랑크 도엘의 답신, 직원들과 주고받는 편지들로 이어진다. 그리고 길게 지속되어 온 우정은 프랑크 도엘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와 함께 노라가 도엘을 추억하고 감사함을 담아 전하는 편지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헬렌 한프의 마지막 편지와 용기를 내어 편지들을 모아 책을 내게 되기까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에필로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곧 영화 <84번가의 연인>로 제작되었다. (영문은 84 Charing Cross Road, 책과 동일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온 것은 왜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이 제목 때문에 영화 애호가들로부터 두고두고 쓴소리를 듣게 했다는 사실도 유명하다)
미국에서 지내는 가난한 작가인 헬렌 한프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국으로 향하고 아무것도 없는 마르크 상회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영국의 작은 고서점. 서점이 아닌 ‘상회’라는 이름의 간판을 건 가게 안은 높은 책장, 오래된 고서적들이 자리하고 직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책을 검토하고 손님들을 맞는다. 젊은 시절의 헬렌 한프는 원하는 책을 구하기 힘들어하던 중에 우연히 잡지에서 본 광고로 마르크 상회를 알게 되고 영국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부드럽게 미소를 보이는 프랑크 도엘의 표정은 영화가 지속되는 내내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직원들이 책을 감싸는 모습은 우리가 지금도 빈티지함을 돋보이고자 하던 묶음의 형태인데 그 책을 다루는 손길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아주 금방 지나가더라도 깊게 머릿속에 남아 있게 하였다.
내가 여러 번 돌려 본 장면 중 하나는, 헬렌 한프가 마르크 상회로부터 첫 책을 받는 모습이다.
“너무나 귀한 책들이라 초라한 제 책장이 부끄럽네요. 이 부드러운 표지와 크림색 종이들... 볼품없는 흰 종이와 보드 표지의 미국 책에 익숙해서 이 책이 더욱더 소중히 여겨집니다.”
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작은 초록색 표지의 책을 한참이나 쓰다듬고 두 손으로 안아 들며 기뻐하는 모습의 헬렌 한프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귀한 책에 비해 자신의 책장이 볼품없게 느껴진다는 헬렌의 말에 친구는 헬렌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내가 이 책이라면 여기가 맘에 들 거야.”
그 말을 들은 헬렌의 표정에는 세상 어느 부와 명성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이 느껴진다.
또 한 장면을 꼭 말하고 싶다. 책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장면이고 아주 금방 지나가는 장면이다. 직원들이 헬렌으로부터 도착한 소포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한 손님이 조심스럽게 그 유리 문을 두드리자 나이가 지긋한 서점의 직원이 얼른 나온다. 손님은 작가의 이름과 책이 생각나지 않지만 책에 대해서 최대한 설명을 하고 가만히 듣고 있던 직원은 작가의 이름을 말한다. 손님은 바로 그 작가의 책이라며 너무나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무엇보다도 책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있어야 손님이 말하는 수수께끼 같은 책을 알 수 있을지 그리고 책을 전해주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편지와 선물들을 주고받으며 계속되는 영화는 그 시대에만 경험할 이야기들, 모습들, 감정들을 보여주었다. 책으로만 편지들을 만나 상상하다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목소리와 얼굴들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헬렌의 친구가 실제로 서점을 찾았을 때 서점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책 속의 내용과는 달리 여기서는 다만 모른척하며 지나가는 모습이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에 살고 얼굴도 보지 못하지만 자신들의 모습을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우정을 더 느끼는 모습들이다. 책에서는 실제로 찾아가는 장면 대신 이대로도 충분하다며 대신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나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라고 말한다. 곧 이 문장은 이 책을 대표하는 것이 되기에 이른다. 물론 영화에도 빠질 수 없는 한 마디로 등장한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 역시 책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그려내지는 못하지만, 책에서 만난 구절이 인물의 목소리로 나오면 반가움에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선물을 전하고 다정한 크리스마스 안부, 새해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 같은 모습이었다. 책을 받아 들고 너무나 행복해하고, 건네줄 수 있을 책을 발견한 순간의 뿌듯한 미소는 이제 책을 읽고 상상만 하던 것에서 더 뚜렷하게 와닿게 한다.
여전히 이 책을 말할 때 늘 인용하는 문장으로 영화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마치고 싶다.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 책 <채링크로스 84번지> 5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