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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Nov 29. 2021

Vol.10:어느 순간은 그리움으로만

월간라이팅클럽



막내는 걸핏하면 이런 질문을 하곤 해.

‘엄마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언제가 젤 좋아?’ 질문이 반쯤 지날 때부터, 머릿속엔 늘 따사로운 볕, 흩날리는 벚꽃잎, 보송보송한 병아리 같은 이미지가 떠올라 ‘당연히 봄이 좋지. 싶은데, 질문을 마친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바라보면 고새 미세먼지가 심한 봄, 변덕스러운 날씨, 생일이 학기 초인 탓에 늘 어정쩡하게 지나갔던 봄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가을이 제일 좋아.’하고 대답하는 거야. 아이가 다시 ‘왜?’하고 물으며 내 무릎에 걸터앉아 목을 휘감고 후후 웃으면 이미 내 대답이 뭐가 될지 안다는 소리지. 그런데도 짐짓 모르는 척, 처음 대답하는 사람처럼 고심하는 시늉을 하며 ‘볕이 좋고, 시원하고, 단풍이 아름답고, 먹을 것도 많은 풍성한 계절이라서 좋아’ 해. 그러면 아이는 뭐라 하는 줄 알아?

‘나는 겨울이 제일 좋아’야. 오백 번도 넘게 들었지만, 그렇다고 다 안다는 듯, 반응할 수는 없어. 왜냐고 물어봐 줘야 하니까. 그럼 득달같이 아이는 또 이렇게 쏟아내. ‘12월 되면 눈도 내리고 눈사람도 만들 수 있고, 크리스마스도 있고, 무엇보다 내 생일이 있잖아.!’ 

그래.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지! 자기 생일이 이제 얼마만큼 남았는지 일러주려고. 속이 뻔히 내다보인다고 해도, 귀여우니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생일에 뭐가 먹고 싶은지, 무엇을 선물 받고 싶은지 물어보다가, 도저히 못 참고, ‘이리 와봐, 요거, 요거.’ 하며 간지럼을 태우면 끝나는 과정, 그러나 얼마 뒤엔 다시 되풀이될 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면, 총알처럼 옛 생각들이 날아들어 잠을 통 이룰 수가 없게 돼. 더듬어 보면, 언제나 나는 봄이 좋다고 하면서도 가을을, 그것도 가을의 끝자락이자 겨울의 문을 여는 11월을, 달력을 한 장 남겨둔 그 쓸쓸하고 시린 계절을 무척 좋아했어. 아니, 애틋했다고 해야겠다. 꼬박꼬박 저무는 하루가 아쉬웠거든. 훌쩍 자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낀 네 마음과 조금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

11월이 되면, 이제는 너무 친해진 친구들과 다른 반이 될 것 같아 두렵곤 했어.  그만큼 함께 하는 순간들이 소중해, 더 조잘대고, 주말마다 함께 어울렸지. 거리마다 수북이 깔린 나뭇잎 카펫을 밟으며 가을 여인이 된 기분도 만끽하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차가운 쇠줄의 감촉에 흠칫 놀라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소중해 이 마음을 어떻게 이름붙여야 할지 모르는 체.

그 모든 추억이 차곡차곡 모여있는 걸 보면 내겐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폴더 옆에 ‘11월’이라는 폴더도 하나 따로 마련돼 있는 거 같아. 



문구라면 모두 열광하던 나와 친구들에겐 ‘팬시점’이 참새 방앗간이었어. 알록달록 각양각색으로 늘어선 예쁜 펜이며, 샤프, 귀여운 디자인의 수첩, 큐빅이 촘촘하게 박힌 머리핀 같은 것들 앞에 군침을 흘렸지. 단정한 디자인의 일기장에 눈길이 가 한참을 들었다 놨다 고민하던 내게, ‘다음 네 생일에 이거 사 줄게’ 했던 친구들의 진담 반, 농담 반 섞인 말. 말만으로도 활짝 밝아지던 마음이.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끼쳐오는 낙엽 탄내가 좋다며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별것 아닌 조각들이 아직도 선연히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참 ‘행복’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구나 싶어.  



올해의 11월도 예전처럼 그래. 얼마 전 ‘꿈다락 토요학교’를 수료하며 첫 책을 만들게 된 큰 아이를 보니 그때의 내 모습이 또 떠오르더라. 친구들과 함께 시화전을 준비하고, 표구상에 가서 액자를 고르고,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 낭송을 하던 나와 친구들 모습이 말이야.

인생의 많은 부분을 아쉬움과 후회를 남긴 나는 옛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이불을 뻥뻥 걷어차곤 하는데, 11월만은 후회가 아닌 그리움이고 애틋함이야. 그러니 폴더가 별도로 있는 거겠지만.^^

이제부턴 이 폴더에 아이의 노력이 깃든 책 한 권이 더 추가될 거 같아. 뭔가 아이에게 바통을 넘겨 준 기분도 조금 들고. 



아이들에게도 어느 순간은 그리움으로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그러면 신기하게도 조금 더 힘을 내고 싶어질 테니까. 그 기억 속에 머물 내 모습 역시 행복하게 남았으면 하고 바라서이기도 하고. 내가 11월을 떠올리며 행복을 다시 맛보듯.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계절이 행복이 되길 바라니까 말이야. 12월이 가장 좋은 막내도, 11월에 생애 첫 책을 품에 안은 큰 애도, 아직은 어느 때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는 둘째에게도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갓 구운 붕어빵 같은 추억들이 함께 하기를 바라보며,  너와 나의 시간과 계절에도 여전히 더 많은 아름다움, 추억, 행복이 새겨지길 고대해. 



언제나 다정하게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던가?^^

정말로 그래. 고마워.





12월에 당도할 네 이야기를 기다리며. 

2021년 11월 26일 

스며드는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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