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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Sep 06. 2018

문을 통한다는 것

정문. 그리고 후문 - 같지만 다른 존재와 의미의 것

이 글로 내 속내들을 드러내는 것이 결국 나에게는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겠지요.


내가 처음으로 여기 늘어놓는 것도 역시 문 이야기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라요.

하루에도 수십 번도 더 드나드는 철문과 상점의 많은 유리문들을 마주하게 되지요

그냥, 첫 정식 글을 시작하면서 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졌구요.



출처 : 그림책 <숲에서 보낸 마법같은 하루>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면서 나의 의욕넘치는 모습 뒤의 감춰진 내 표정은 아마 이럴지도 모르겠어요.

문을 넘어서서, 한 걸음 내 딛는 것 조차도 불편함과, 두려움, 피하고싶은 심정이 얽힌 감정들

하지만 문이라는게 워낙 익숙한 존재이니, 문을 넘어서는 것도 역시 익숙한듯

그렇게 내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손을 대고 밖으로 나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서야 무거운 문을 힘을 주어 밀고 들어서고 나서야

나의 모든 긴장감도 풀리게 되지요.


그리고, 문이 하나인 곳을 좋아해요. 정문과 후문의 구분이 없는 곳.

문이 하나인 곳의 그 작을수밖에 없는 공간과 작은것과 비례해서 느껴지는 친밀한 공기를.




정문과 후문


는 유난히도 정문과 후문을 구분하려 들기도 합니다.

같은 의미로의 드나듦의 매개체가 되는 것은 같지만,

들어설 땐 굳이 정문으로 들어서려 하고

나설 때도 웬만하면 정문으로 나서려는

이상한 심리를 내보이기도 하지요.


큰 상점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큰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면서

정문과 후문의 구분은 자연스레 생겨나게 되더군요.


사실은,

우습게도 가끔 아파트의 정문과 후문을 헷갈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구요.

부산에서 지내던 난 그 시간들 속에서는 정문과 후문의 구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는데,

서울로 올라와 타향살이를 하게 되면서 유리문들은 어찌나 다들 크던지,

유리문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편안하게 들어갈 수만은 없었던.

그런 곳이었어요. 이십대에게 서울의 이미지는.

그런데, 여전히 그 이미지는 경기도로 들어와서도 없어지기는 커녕 신도시가 개발된다며 더 커지고 있으니.

비록 그런 모습이 있었던 나라고 해도 딸의 보호자로써 혹은 이제 어른으로써 그것들을 드나들 때

어색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자신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점은, 규모가 커서이기도 하지만 주문 후 결제를 미처 하지 않고 가는 손님이 생길까봐 그런것일지

아니면 편리함 때문인지 (편리함이라는 것이 이유중 더 크게 차지하는 것이겠지) 선불로 계산하고,

모든 용무가 끝난 손님은 자연스레 짐을 챙겨 문을 나서지요.

작은 공간에서 눈 마주치며 인사하고, 나서는 것과는 다른.

뭔가 쌩한 느낌의 그것을 왜 나만 유달리 크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편리함에 동반하여 오는 차가운 모습이 끝내 아쉽기도 해요.


정문으로 굳이 드나드려는 감정에는 정문이 옳은 방법이라는,

아주 좁은 편견도 자리한 것이겠죠.

익숙함과 옳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일거라고.

익숙함을 벗어나는 것을 싫어하는 생각들도 반영된 것일테고.




출처 : 그림책 <작은 집 이야기>


문을 나선다는 것이.



어쩜 문 그자체는 변화가 없겠지만, 그 문을 나서는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을 끌어당기곤 하지요.


익숙함을 향해 가는 것도, 새로움을 향해 가는 것도.

문을 나서지 않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리라고.


는 지금 문을 나섰고, 한 발 내디뎠어요.

그게 아주 어설프게 시작될거라 해도

서른 중반의 내가슴이 쿵쾅거리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고..


나중에 여기 글들을 보고 웃게 된다해도 서른 중반 여자의 귀여운 뜀뛰기로 너그러이 봐 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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