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10. 비행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창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빛 속에만 머물지 않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면 생각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그림자가 드러나고 다른 이들도 알아보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빛 속이 아니다.
<멀고도 가까운> 272p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 적어도 글 한 줄을 창조해내는 것 역시 그렇게나 막연하게 느껴지곤 한다.
아니, 어디서 어떤 단어로 시작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하기를 수십수만 번째.
여태껏 어떤 확신 없이 글을 써 내려갈 때가 많지만,
적어가다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을 만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가끔 만날지라도 내가 글을 또 쓰면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또 기꺼이 막막한 그 길을 걸어가고 싶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나간다.
<멀고도 가까운> 278p
책의 문장에 휩싸여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적어도 이 책 속에서는 수십 번 길을 잃지 않았었나.)
여전히 그녀가 하는 말의 꼬리라도 잡고 싶지만 되돌아서 다시 앞의 글을 읽기도 수십 번이었다가
결국 포기하고 끝에 다다르고,
또다시 처음부터 읽고.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 힘을 빼고 읽어나가고
우리가 정리 정돈된 생각만을 하지 않듯이
그녀 또한 그러리라는 생각으로
어쩌면 그녀 속에 담긴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이렇게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었구나.
그런 조금의 연민의 감정도 혹은 존경의 감정도 함께 들고나니
조금 더 내가 책 속으로 걸어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 여정이구나.
그녀의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여정을,
나도 길을 잃은 것 첨 느껴질 만큼 푹 빠져서 함께 걸어가는구나.
내 이야기가 당신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의 생각이나 작품 안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 또한 언제나 우리 모두에 의해, 우리의 신념과 행동과 정보와 물질로 만들어지고 있다.
<멀고도 가까운> 280p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거꾸로 그 길을 되돌아서 그 소리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다. 이 듣는다는 행위 말이다. 이는 당신이 각각의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당신의 고유한 언어로 그것을 번역하는 것, 당신이 이해하고 반응할 수 있게 당신의 우주에서 그 자리를 찾아주는 것, 그리하여 그것이 당신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멀고도 가까운> 2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