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연주 Nov 04. 2019

이야기들이 미로가 되는 것처럼.

<멀고도 가까운> 11. 얼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원재료를 특정한 형태로 옮기는 일이며, 무한히 흩어져 있는 잠재적 사실에서 눈에 띄는 것을 골라내는 일이다.




<멀고도 가까운> 307p








해골 여인 이야기. 아타구타룩. 프로이켄. 얼음, 얼음집.




이 장의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장까지 닫고 났을 때 나에게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는 저게 전부였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아이슬란드에 대한 동경의 감정까지 갖게 하는 그녀지만

처음 읽었을 때도 두 번째도 지금도, 이 장이 제일 미로를 헤매게 하는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고 또 변해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것이 마치 데자뷔처럼 다른 동화들이나 이야기 속에서 다른 형태로 회자되는 걸 보거나

이미 우리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깊숙이 침투한 많은 형태의 이야기들은 

소름 끼치게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해온 글에서 글로 소통되어왔던 결과이겠지.






그린란드 동부의 작은 집에서 얼어버린 프로이켄의 숨처럼, 조금씩 당신을 향해 조여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다지 근사하지 않은 도구나 들숨만 가지고 힘겹게 벗어나려고 애쓰게 되는 이야기들도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녹아 없어지는 썰매처럼 해체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다른 이야기가 그렇듯이, 폭풍우와 어둠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도 있다.






나를 북쪽으로 이끌어간 것은 냉기와 순백의 정경이었지만, 내가 그곳에서 만난 것은 오히려 온기와 어둠이었다. 나는 미로의 어둠을 경험하고, 온기가 있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녹아내리는 썰매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미로가 되어버린 이야기였다.




<멀고도 가까운> 315p                                                  





헤매고 헤매면서 빛과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빠져나오는 걸 수십 번 반복한다.

역시, 쉽지가 않다. 

이야기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헤매다가 겨우 빠져나오지만 다시 기꺼이 들어가기를 자처하고 만다.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 질문. 그 자체로 하나의 미로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그녀도 한 번의 호흡을 길게 내쉬고 시작하였겠지.


이 책의 글들이 말을 걸어오는 그 이야기들을 내가 편히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언젠가 또 펼쳐 볼 미로를 헤매게 하는 이야기들이지.








매거진의 이전글 이야기가 당신 속으로 들어갈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