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 는 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시는 행복없이 사는 훈련'인 것이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안개처럼 일상에 스며있는 여성 억압적 현실은 퍽 쓸쓸하고 암담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결은 얼마나 무한하고 섬세한가. 여자로 사는 고단함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을 생각한다
-김기택의 시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부분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인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평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내게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 살아간다. 또 다시 내 앞에 물살 거센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의 말은 충분히 불우했으되 나의 몰락과 미망을 도와준 바람의 말이었다고 말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고 말한 니체의 말을 내것으로 삼는다.
황지의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 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