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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Sep 21. 2018

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 - 은유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 는 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시는 행복없이 사는 훈련'인 것이다.









예전부터 읽었어야 할 책을 이제서야 꺼내 들었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시작으로 은유 작가님의 삶을 무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행과 행복. 그 큰 차이라 여겨지던 것을 아슬아슬 줄다리기 하듯 내 마음도 널뛰기를 할 때가 많았다. 내가 많이 웃는다고, 내가 열심히 지낸다고 내가 무조건 행복한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불행하지만은 않았기에 어쩌면 그 중간 즈음에서 항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글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밑바닥에 있던 감정까지 다시 꺼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든 것을 극복하고나서야 이렇게 되었다는. 많은 이들의 글을 너무 싫어하는 나로서는, 과거의 여러 경험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그걸 겪고 이겨내는 그 과정을 상상해보면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싶은데 그것을 너무 심하게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않고 흘러가는 기억을 잠시 꺼냈다가 다시 넣는 느낌으로 말하니 오히려 더 마음을 넣게 된다. 은유 작가님의 글 속에 말이다. "그랬었지.."라는 느낌으로 우리가 이야기하곤 하는 그것 그대로. 더 이야기하거나 더 빼지도 않고. 그 이후의 감정과 깨달음을 더 이야기하니 그것이 낯설거나 너무 과장되지도 않고, 나는 이런 은유작가님의 글을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은유 작가님의 표현들에 반해서, 

보물을 주워 담듯이 문장들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개처럼 일상에 스며있는 여성 억압적 현실은 퍽 쓸쓸하고 암담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결은 얼마나 무한하고 섬세한가. 여자로 사는 고단함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을 생각한다
-김기택의 시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부분









나역시 매번 나의 좁은 시야에, 나 스스로가 놀라곤 한다. 내가 이렇게 속좁은 생각을 했었나?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나? 한 대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 수 밖에.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인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평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내게 삶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런 난해함을 삶의 일부로 껴안고 살아간다. 또 다시 내 앞에 물살 거센 긴 강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쟁이의 말은 충분히 불우했으되 나의 몰락과 미망을 도와준 바람의 말이었다고 말하게 된 지금에서야, "과거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고 말한 니체의 말을 내것으로 삼는다.








유독 니체의 말이 많이 나왔고, 이전보다 더 니체에 다가선 것 같은 착각까지 느끼게 한다. 나도 만나볼까? 









황지의 시인의 말대로 "삶을 한 번쯤 되물릴 수 있는 그 곳"에 간다면 난 얼마나 다르게 살 것인가. 아파하고 아파하는 이를 알아보면서 이 아픔의 전승구조에 몸을 싣고 아마 지금처럼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것밖에 힘이 없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누구나 지금이 존재의 최선이다.




이 말이 내내 걸리고 또 되새겨지게 된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어떤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면 <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우리네 일상. 우리들의 생각들을, 어쩌면 다르다고 여겨오던 이들의 생각까지도 결국은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럴 수 밖에 없었겠네. 애썼네."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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