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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주 Apr 29. 2020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간다고.

버지니아 울프 <지난날의 스케치>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머무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다가왔다 사라지고, 커지다가 작아지고, 서로 다른 속도로 그 작은 아이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땅속에서 떠밀려 올라온 식물의 줄기가 자라고 이파리가 나오고 꽃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듯이 그 작은 아이는 스스로 멈추거나 변화시킬 수없이 떠밀려 팔다리가 자라고 나아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느낌은 묘사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이미지를 너무나 정적으로 만든다. 이러이러하다는 말을 하자마자 지나가 버렸고 달라졌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 <지난날의 스케치>



버지니아 울프의 회고록을 펼쳤습니다. 사실 저는 재작년에도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를 펼쳤다가 머리가 어지럽고 아찔한 느낌에 사로잡혀서 도저히 10장도 채 넘어가지 못하고 포기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저의 독서력으로는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었고 정말 헤매고 헤매다가 길을 잃어버릴 것 같더군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우연히 받아 들어 품에 안고 돌아오게 한 이 책은 정말 판형이 작았죠. 하지만 책의 여백은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까만 글로 채워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쏜살 문고'와는 사실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한참을 되짚어보며 읽어나가게 되고 천천히 읽어나가야 할 것 같거든요. (사실, 책을 읽어나가는데 처음엔 여러 번 멈칫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읽으면 읽을수록 어느새 그녀의 글에 정말 사로잡혀버린 저를 더 이상은모른척할 수가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전의 자신의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 가족들에 대한 기억들이 엮어진 책입니다. 바네사로부터 회고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글은 시작하죠. 그런데 이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스라이 느껴지는 겁니다. 영화 속 이미지를 떠올려보듯이 말이죠. 이미 이 책과, 그녀의 글들에 대해 매료당해버릴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된 것처럼.








인생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다면, 인생이 우리가 계속 채워 가는 그릇이라면, 그렇다면 내 그릇은 의심할 바 없이 이 기억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잠이 들락 말락 한 상태에서 세인브아이브스의 아이 방 침대에 누워  파도가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며 해변에 밀려오고 노란 블라인드 뒤에서 하나둘 하나둘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바람이 블라인드를 휘날리며 바닥의 작은 도토리를 끌어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가만히 누워 철썩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빛을 보며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며 더없이 순수한 황홀함을 느낀 기억이다.




버지니아 울프 <지난날의 스케치>






로저 전기를 집필하는 중간중간 그녀는 가족들의 모습과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전쟁을 겪는 이야기도 흘러가듯이 함께 드러나고 있죠. 지극히 예민한 감성이 결국 엄마의 죽음을 겪고 나서야 폭발하듯이 강렬하게 만들었다는 부분에서는 그녀를 평생 그리워하게 만들 천재적인 재능을 자신도 발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고요. 




그녀에겐 그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마는 글이 되었을지 몰랐을 테지만, 불확실하고 우울함을 불러일으키는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그리고 천재적이라 불리는 그녀의 많은 글들이 나오게까지 한 감정들을 담은 것으로도 이 책에 보내는 찬사가 불투명하지 않은 확실한 감정이 되게합니다.




쉬이, 가볍게 덮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여러 번 책을 넘기면서 읽어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렇게 하염없이 지나가게 될지라도. 그것을 아는 그녀의 글이라도.


**다음 발행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단상입니다. -  또 ! 버지니아 울프 <지난날의 스케치>, 그리고 박경리 <토지7> 의 리뷰(매거진: 책속에서 끌어올린 문장 / 나를 이끄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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