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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Aug 18. 2020

용두사미가 싫다면 ‘팀 용두’는 어때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그든요

 나는 늘 뒷심이 부족한 내가 불만이었다. 허구의 세계인 드라마조차도 용두사미로 끝나면 화딱지가 나는데, 용두사미의 인간화가 나라니 영 찝찝한 것이 아닌가! 머리만 잘린 용이 그득한 방에 뚝 떨어지는 꿈…까지 꾼 적은 없지만, 뒷심이 부족한 끈기 없는 나는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노력형과 재능형으로 사람을 크게 둘로 분류해야 한다면 나는 재능형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인간이었다. 재능이 넘쳤다기보다 꾸준한 노력과 원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 시험을 보면 늘 벼락치기를 했고 그게 더 능률이 좋았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를 갈 때부터 선생님을 했으면 좋겠다며 교대나 사대에 입학하기를 바랐지만 나는 끈덕지게 시험공부를 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이유가 참 허접함) 완전히 다른 전공을 택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에는 공무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도 바이 바이. 공무원 시험 준비할 자신이 없어서(역시 이유가 허접함) 등 떠밀리듯 치열한 사기업의 세계로 점프해버렸다.


 늘 똑같은 자세(attitude)로 똑같은 시간 공들여 공부하던 친구가 좋은 성적으로 교대에 입학하는 것을 봤을 때도 믿지 않으려 했었다. 대학교 때 성실함의 아이콘이었던 친구가 번듯한 기회를 거머쥘 때에야 나는 조금 흔들렸다. 아닌척했어도 그쯤에선 인정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꾸준함도 재능이라는 것을, 그리고 난 그 재능은 영 없다는 것을. 용의 머리보다 중요한 건 몸통부터 꼬리까지 이질감 없이 이어지는 모습이라는 걸 말이다.


 용머리로 시작했으면 용 꼬리로 끝날 때까지 꾸준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걸 알긴 했지만, 사람이 어디 변하기가 쉽던가. 직장인이 되어서도 나는 번번이 꾸준함과 성실함의 벽에서 무너져 내렸다. 용두(龍頭)에서 시작해 꼭 사미(蛇尾)로 끝났다. 코로나19에 장마에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 구실이 넘쳐나는 요즘, 회사에서 빛이 나는 사람들 뒤에서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학교 다닐 때나 회사 다니는 지금이나 꾸준하고 열심인 사람들 그림자에 깔려 나는 죽는구나, 하는 우울하고 침울한 생각을. 저 사람은 어쩜 저렇게 심지가 곧아, 어떡하면 저렇게 한결 같이 열정적일 수 있는 거지? 난 저렇게 못 될 거야…….


 패배주의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 자기 방어기제처럼 불현듯 유튜브에서 봤던 ‘팀 정세운’이 떠올랐다. 어느 한 ‘나’가 삐끗하더라도 다른 ‘나’가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게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진 각자의 ‘나’들이 여러 면면을 가진 입체적인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한다는. 언젠가 TV에서 봤던 소설가 김중혁 씨가 말한 ‘여러 개의 김중혁’에 대해서도 생각해냈다. 가장 소중한 ‘소설 쓰는 김중혁’이 오롯이 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방송하는 김중혁’, ‘잡지사 기자 김중혁’ 등 여러 김중혁들이 합심해 ‘소설 쓰는 김중혁’을 뒷바라지하는 데 애쓰고 있다던.


‘팀 정세운’과 ‘여러 개의 김중혁’. ‘여러 개의 김중혁’ 얘긴 어쩐지 좀 찡했다.


 그렇다! 용두사미인 내가 그렇게 걱정이라면, ‘용두’까지만 하고 지쳐 나가떨어지는 ‘나’들로만 팀을 결성해 용두인 ‘나’들을 이따금씩 꺼내서 재활용한다면 어떨까 하는 기막힌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시작하기만 하고 끝맺음엔 지독히 서투른 나라도 ‘용두’만 모인 팀이면 뭐 언젠간 결론이 나지 않겠나. 끈기가 떨어지는 나는 뭐 하나를 끝내려면 용두인 ‘나’들을 여러 번 호출해야 할 테니 아마 빠르거나 쉽게 성공을 거머쥐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저것 일 벌이기만 좋아하고 끝맺음에 허술한 나를 실패의 결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포텐셜 있는 팀원들을 포섭해둔 팀장 같은 넉넉한 마음이 든다.


 일단 요즘은 ‘글 쓰는 나’가 열일하고 있다. 글 쓰는 ‘나’가 힘이 빠지면 (이건 용두면 곤란하긴 하지만)‘돈 쓰는 나’가 열일해줄 것이고, 돈이 떨어지면 ‘직장인인 나’가 진짜 회사에서 일을 해줄 것이다. 실은 이렇게 모인 ‘나’들이 전부 ‘용두’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엄청난 자의식 과잉이긴 하다. 뭐, 어차피 이게 다 나 혼자 하는 ‘나’ 놀음이니 그럴 땐 그냥 ‘자신감 있는 나’가 활약한 결과라고 치자. 그래도 된다. 내가 팀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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